아마 1990년대 중반이었을 테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을 들고 그 길을 따라 여행을 다니던 때가.
제1권은 해남과 강진, 땅끝마을, 월출산, 고창 선운사 등 산들이 낮게 깔린 전라남도의 넉넉하고 푸근함을 느낄 수 있는 답사길이다.
<다산초당> 마루에 잠시 앉아 다산의 마음을 느껴 볼세라 들고 간 책을 뒤적이곤 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온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 손에 그 책이 들려 있었다.
요즘같이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런 아날로그적 낭만이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든 광경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나올 때마다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제주 편이 기억나지 않을 걸 보니 6권까지 읽은 모양인데 그 책들을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다.
2004년 이집트로 해외 파견 근무를 가면서 가지고 있던 책을 같은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에게 나눠 줬는데 그 속에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더라면 책 어느 귀퉁이에는 뭐라고 써 놓았는지, 어느 페이지에 손 때가 묻었는지, 어디를 다녔는지 좋은 추억거리가 되었을 성싶은데 아쉽다.
책을 읽고 나면 책 표지 바로 뒤 간지에 읽은 날짜와 간단한 소감을 꼭 적었었는데, 궁금하다.
저자의 발길을 따라다니며 그가 본 것을 보고 싶다고 했을까?
어느 집, 어느 책꽂이에 아직도 꽂혀 있을까?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에 보이는 것과 다르다."
이 말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서문에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나도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조선 정조시대 유한준이라는 문인이 대수장가 석농 김광국의 수장품에 붙인 원문을 유홍준이 나름 각색한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어디 문화재뿐이겠는가.
사람도 그렇잖은가. 서로가 서로를 알아갈 때 사랑이 싹트고,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완전히 달라 보이게 된다. 눈에 콩깍지가 씐다.
문화재도, 사람도, 그림도, 음악도 그렇다.
나에게는 심지어 커피도 그렇다.
무더위도 지쳐간다. 제아무리 맹위를 떨쳐도 시간은 흘러가고 계절을 다시 돈다.
태풍의 끝자락에 문득 가을이 묻어오지 않을까.
신발끈과 마음을 조이고 길 떠날 채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