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생각 33: 치매일지도

by 배정철

책상 위에 있는 컴퓨터를 켠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상록골프 앤 리조트'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예약 가능한 티업타임이 있는지 찾아본다. 천안상록은 없고, 남원상록은 있다. 8월 13일 일요일 12:12가 비었다. 예약 가능하다.

'일요일이라, 어쩌지? 오랜만에 상록으로 라운딩을 가봐?' 예약 신청 버튼을 누른다.


전국에 상록골프장은 화성, 천안, 남원 김해 네 군데다. 재직공무원과 연금수급자 그리고 그 배우자들은 회원대우를 해주기 때문에 다른 골프장에 비해서 그린피가 싸다. 요즘은 골프 인구가 많이 늘어서 그런지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주말 시간은 4주 전에, 주중은 5주 전에 예약을 하고 추첨에 의해 당첨이 결정되는데 로또만큼 안된다. 8월 휴가철에 취소하는 티업타임이 가끔 나온다. 눈이 밝고 부지런하고 운이 좋으면 잡을 수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자, 이제 예약을 했으니 같이 갈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에게 카톡을 날리고, 골프 동아리 밴드에도 '번개'를 올린다. 역시 다들 바쁘다. 서울로 놀러 가는 사람, 서울에서 놀고 있는 사람, 몽골을 간다는 후배, 그 시간이면 베트남에 있을거라는 분, 집안 행사가 있어서 고향에 가야 한다는 선배, 장모님 댁에 가야한다는 분, 골프 선약이 있다는 사람.


퇴직하고 매일을 일요일이요 휴일 같은 나 같은 사람만 시간이 있나 보다. 하긴 오늘이 목요일이고 다가오는 일요일에 라운딩을 가자고 했으니 멤버 구성이 쉽지 않다. 다행히 후배 한 명이 동참할 의사를 보이고, 같이 갈 사람도 알아보겠다고 한다. 됐다!


어찌 되던 되겠지. 안심하고 샤워를 하는데, 아뿔싸! 바리스타 실기시험일이 일요일 아닌가? 그날이 그날인데... 감던 머리만 대충 닦고 나와서 밴드에 올린 '번개'를 보니 다행히 신청자가 없다. 삭제했다. 동참하겠다던 후배에게도 시험 날이랑 겹쳤다고 미안하다고 문자를 날린다. 마음 좋은 후배는 그럴 수 있다고 미안해하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를 한다.


나 말고 다들 바쁜 게 얼마나 다행인지, 휴~

골프 예약도 취소해야지 하는데 인터넷으로 취소가 안된다. 전화를 한다.

"3일 전 취소라 3개월 예약 페널티 있습니다. 아시죠?" 취소된 게 어딘가. 그 정도야 감수해야지.


바리스타 학원에 가서 주말에 실기시험 연습을 한다. 같이 배우던 사람들은 한 달도 전에 다 시험 치고 자격증 받았는데, 나만 시험을 치르지 못해서 다시 연습하는 거다. 실기시험 접수하는 걸 잊어 먹어서다. 그래서 특별 연습을 하는 거다. 세 번 정도하고 나니 안심이 된다. 수험표는 인쇄해서 학원 선생님이 보관하고 있다가 시험일에 주신다고 한다. 안 가져 오는 분이 많아서 그렇단다.

"오늘 잘 배웠습니다. 그럼 일요일에 뵙겠습니다~"

"실기시험은 토요일인데요?"

"네?..."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아이고 안 되겠네요. 이 수험표는 가져가세요. 제가 한 장 더 뽑아 둘게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핸드폰에 있는 캘린더를 확인해 보니, 토요일: 바리스타 실기 시험, 일요일: 남원상록골프라고 떡하니 메모가 되어 있다.


언제가 그런 일도 있었다.

아내랑 둘이 밤에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 상영 시간이 다 되어 갈 때쯤 영화관에 도착해서 헐레벌떡 올라갔다. 직원이 표 검사를 하는데, 핸드폰에 저장된 걸 띄워서 보여줬다. "네, 들어가세요" 스크린에서 막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고, 조심조심 자리를 찾아가서 앉았다.


그런데 뭐가 좀 이상하다. 내가 예약한 영화는 분명 외국 영화였는데, 한국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이게 뭐지? 폰을 확인해 보니, 예약은 창원 CGV에 하고, 관람은 세종 CGV로 온 거였다. 직장은 창원이고 주말에 세종에 다녀가던 시절이라 헷갈렸던 모양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표 검사하는 직원은 상영관과 시간만 대충 확인한 거였고, 예매율이 낮은 영화라 예약한 자리는 우리를 위해 비어 있었다.


학원에서 오는 길에 좀 우울했다.

"이 정도면 치매라고 해야 하나?"

집에 와서 심드렁하게 얘기했더니, 그 소리 듣고 딸이 한 대 더 때린다.


"아빠, 원래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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