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는 화상이 여럿 있다. 다른 상처와는 다르게 화상을 입으면 상처가 오래 남는다. 오래라는 것이 그저 몇 년 동안이 아니라 대개 그 흉터는 지워지지 않고 문신처럼 몸에 새겨진다. 팔과 배에 남은 흉터는 옷으로 덮을 수 있지만, 얼굴에 난 상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흉터를 남긴 당시의 사고 기억이 뚜렷하지 않아 마음의 상처로까지는 이어지지 않는 거다.
아주 어렸을 때다. 얼굴에 뜨거운 물이 덮쳐 화상을 입었다. 오른쪽 눈썹 끝부분 주위에 흉터가 있는데 그곳에는 눈썹이 자라지 않고 다른 곳 보다 피부색이 더 검다. 매일 거울로 마주하는 얼굴이라 그런지 평소에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지낸다. 이제는 검버섯인지 흉터인지 분간도 잘 되지 않는다.
팔에 난 흉터는 그보다 훨씬 크고 뚜렷해서 어릴 때부터 늘 마음에 걸렸다. 팔꿈치 안쪽에 넓게 화상 흉터가 남아 있다. 다섯 살 때로 기억하는데, 집 근처 중학교 형들이 단체영화 관람을 가기 위해 집 앞을 지나고 있었다. 집 앞에 나와 서 있다가 교복을 입고 줄을 맞춰 지나가는 형을 툭 치고는 지레 겁먹고 집 안으로 급히 도망가다 뜨거운 물이 있는 솥에 걸려 넘어졌다. 붕대를 칭칭 감고 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흉터가 남을까 요즘처럼 유난스럽지 않던 시절,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했던 모양인지 팔이 접히는 부분에 흉터가 진하게 남았다. 더운 여름에도 흉터를 숨기고 싶어 늘 긴소매 옷을 입고 다녔다.
배에도 화상 흉터가 있다. 어릴 때 연탄화로 위에 엎어져 생긴 상처다.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은 걸 보면 다섯 살보다 더 어릴 때의 상처인 듯한데, 십 대 후반까지 배꼽 아래쪽에 호떡만 한 하얀 반점이 있었다. 목욕탕에 가거나 남강에 가서 수영하면 놀 때 늘 신경이 쓰였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새까맣게 태우고 난 뒤로 신기하게도 사라졌다.
왼쪽 무릎 바깥쪽에도 오백 원짜리 동전보다 더 큰 흉터가 있다. 초임 교사시절, 소풍날 동네 학부모들에게서 못 마시는 술을 억지로 받아 마시고 잔뜩 취해, 집에 가지 못하고 학교 당직실에서 자다가 생긴 상처다. 오후에는 좀 쌀쌀했던지 연탄불을 때고 있었고, 이불도 깔지 않고 자다가 뜨거운 방바닥에 데었다. 보건소에도 가지 않고 혼자서 커다란 물집 터트리고 약만 바르고 하다 보니 까만 딱지가 앉았다. 초임시절 벽지 학교의 추억이다.
더 큰일이 날 뻔도 했다. 4월 중순쯤 봄소풍을 가는데, 장소는 학교에서 가까운 뒷산이었다. 벽지 학교에 전교생은 스무 명 정도, 학부모들도 경운기에 음식을 잔뜩 싣고 따로 온다. 아이들과의 놀이는 잠시이고 학부모들과의 점심시간은 길다. 점심 먹고 나면 마을로 내려가자고 성화다. 주관한 마을에 가서 저녁때까지 놀아야 소풍이 끝나던 시절이다. 1990년대 초에는 분리수거, 쓰레기 되가져 가기 등의 개념이 아직 없던 때다. 뒷정리를 깨끗하게 하고 가려고 쓰레기를 모아 태웠다. 산에 길을 넓힌다고 그랬는지, 사람 키 높이만큼 흙을 덜어 낸 곳이라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불붙은 쓰레기가 잘 타도록 긴 나뭇가지로 휘적휘적 건드릴 때다. 휙 하고 부는 바람을 타고 불씨가 언덕 위로 날아가더니 나무와 풀에 불이 붙었다. 바짝 말라있던 것에 퍼져가는 불은 정말 빠르고 사나웠다. 급하게 뛰어 올라가 나뭇가지로 불을 내려 치자 불은 두 개로 나뉘어 더 퍼졌다. 다행히 경운기를 몰고 따라온 학부모 여럿이 삽시간에 뛰어 올라와 같이 불을 껐다. 하마터면 교직생활 1년 만에 종 칠 뻔했다.
이 봄에 온 산이 불타고 있다. 벌써 여러 날이다. 산이 타고, 마을이 타고, 절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었다. 놀라 달아나던 청설모는 굴속에서 머리를 안쪽으로 박고 죽었을 테고, 어미 고라니는 불 속을 뛰다 뛰다 제 새끼를 끌어안고 죽었을 것이다. 새들은 날아 오르다 검은 연기 속에서 숨을 헐떡이다 잿더미 위에 떨어져 내렸으리라. 소리 없이 죽어간 산의 생명이 얼마나 많단 말인가? 바람은 왜 이리도 부는지, 봄비는 언제 오려는 것인지...
불타는 산을 보고 있으면 내 몸의 오래된 흉터가 뜨겁게 이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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