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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철 Aug 19. 2023

꼰대 생각 36: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원효 깨달음 길가에 핀 상사화

코스 : 원효 깨달음길 4,5코스 일부 10.76km

 -보원사지~용현자연휴양람~가야산 상사화 군락지~백암사지~보원사지

소요시간 : 3:38


09:30, 보원사지에서 집결이다.

오늘은 혼자 걷는 게 아니라 같이 걷는 날이다. 사단법인 '내포문화숲길'에서 마련한 <내포문화숲길 상사화 걷기>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세종시에서 보원사지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린다. 고속도로에서 내려 지방도를 따라 달리다 4~5km 지점부터는 길이 익숙하다. 몇 해 전, '서산마애삼존불'을 보기 위해 왔던 그 길이다. 어죽을 먹던 용현집을 지나 계속 안쪽으로 계속 올라가니 제법 널따란 공간이 나온다.  며칠 전에 유홍준의 [안목] (눌와, 2023)에서 서산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에 대한 설명을 읽었는데, 이곳에서 상사화 걷기를 한다니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원사지는 백제 때 창건되어 통일신라와 고려왕조를 거치면서 크게 번성하였다고 한다. 한때는 이곳에서 수도하는 승려가 1,000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빈터를 보고 있자니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현재는 임시법당과 화장실 등 관리동이 있고 옛 절터에는 서쪽 산 아래에 법인국사보승탑비와 승탑, 빈터 중앙 부분에는 보원사지 5층석탑이 그리고 용원계곡에서 내려오는 개울 건너에는 단아한 당간지주만이 그 옛날의 융성함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을 뿐이다.


50명 신청 마감이라고는 하는데 이 더운 날씨에 사람들이 오겠나 싶었는데 하나 둘 모이더니 금방 50명쯤 되는 인원이 모였다. 사단법인에서 나온 분들이 등록 사인도 받고, 간식도 나눠주고, 상사화가 이쁘게 인쇄된 배지도 준다. 혼자서 딴 길로 가지 말 것, 상사화가 있는 곳에 너무 가까이 가서 알뿌리를 밟지 말 것, 꽃이 덜 피었다고 실망하지 말라는 당부를 한다. 오늘 코스는 원효대사의 흔적을 따라 절터와 절터 사이를 걷는 길이라고 한다. 당간지주를 바라보며 5층 석탑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드디어 출발~


당간지주가 있는 쪽 다리를 지나 용현자연휴양림 방향으로 걷는다. 아스팔트 포장도로와 인도가 잘 설치되어 있어서 걷기에 좋다. 8월 중순의 햇살은 아직은 뜨겁다. 1.2km 정도 올라가니 용현자연휴양림 입구다. 개인적으로 오면 입장료 1,000원을 내야 하지만 단체에서 미리 협조 요청을 했기 때문에 무료란다. 전날에 입소한 사람들이 많은지 주차장과 휴양림 숙소 앞에는 차량이 많다. 아침이라 그런지 계곡에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다.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에 가을이 살짝 묻었다. '곧 가을이 오겠구나'


3km를 걷고 잠시 쉰다. 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이는데 여기저기서 오이, 포도, 방울토마토, 복숭아가 돌아다닌다. 직접 재배한 것을 나눠 먹으려고 조금 넉넉히 가져오신 모양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땀 흘려 가꾼 채소와 과일을 나누는 마음이 참 감사하다. 방울토마토 하나 거두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셨을 텐데... 그 마음이 복숭아보다 더 달다.

3.8km 지점에서 백암사지가 있는 왼쪽 산등성이로 올라선다. 지금까지 걷던 길과는 다르게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작은 바위를 디디며 걷는데 숨이 곧 차오른다. 그러다 바라본 저쪽 등성이에 연노랑꽃이 피었다. 가느다란 꽃대에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수줍은 듯 살짝 고개를 숙인 꽃, 상사화다. 그것을 시작으로 산을 올라갈수록 드문드문 상사화가 보인다. 아직까지는 군락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수이지만, 지난 큰 비에 쓸려가지 않고 뿌리를 내린 것이 고맙다.


상사화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늦은 봄에 잎이 나서 진 후, 여름에 꽃이 피는데 꽃과 잎이 다른 시기에 피어 만날 수 없는 연인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이런 꽃에 사연 하나 없을 수가 없다.

'옛날에 금슬 좋은 부부에게 늦둥이 딸이 있었다. 아버지가 병환 중 세상을 뜨자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빌며 백일 동안 탑돌이를 시작했다. 이 절의 큰스님 수발승이 탑돌이를 하는 여인을 연모하게 되었으나 중의 신분인지라 이를 표현하지 못했다. 여인이 불공을 마치고 돌아가자 스님은 그리움에 사무쳐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듬해 봄, 스님의 무덤에 잎이 진 후 꽃이 피었는데, 세속의 여인을 사랑한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스님을 닮았다 하여 꽃의 이름을 상사화라 지었다. <위키나무에서 인용>'


저 아래 보원사가 중흥할 그 시기에 가야산 일대에 암자가 100여 개나 되었다고 한다. 원효 깨달음길 4코스에는 백 번째 말사라는 백암사지 외에도 여러 폐사지가 있다. 그 길가에 이 더운 여름에 상사화가 피었을 터, 산을 오르내리며, 절과 암자를 지나다니며 상사화를 보며 속세의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을까. 연노랑 치마를 입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돌리던 옆 마을 그녀를 생각했을까. 아, 속세의 인연을 끊어 낸다는 것이 얼마나 속절없는 일인가. 조용히 합장하고 길을 오르는 스님의 머리에 맺힌 땀방울에 한여름 햇살이 한 줄기 내려앉는다.  

오르막을 오르다 보니 행렬의 꼬리가 길어졌다. 5.2km 지점까지 올라갔다가 산허리를 돌아 내려온다. 먼저 내려간 일행의 목소리가 계곡을 타고 소란소란 올라오고, 저 뒤쪽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의 소리가 잣나무 사이로 내려온다. 어느덧 숲 속의 습도는 낮아지고 바람도 온기를 많이 내려놨다. 곧 가을이 올 것이다.


산길을 1km 정도 내려오니 임도다. 여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백암사지로 올라가던 그곳이니 이제부터는 편안하게 내려가면 된다. 발걸음이 가볍다. 올라갈 때는 비었던 계곡에 사람들이 막바지 물놀이를 즐기는 중이다. 한참을 걸어 내려오는데, '내포문화숲길' 스티커를 붙인 차량이 멈춰서더니 쭈쭈바를 건네 준다. 선한 그 얼굴의 미소가 서산마애삼존불의 그 분을 닮았다.


* 늦은 점심은 예산읍 <오복식당>에서 비빔국수와 메밀콩국수를 먹었다. 다시 찾고 싶은 맛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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