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주체적 자아로 살아간다는 것

by 배정철

여자의 물건, 남자의 물건

‘괜찮은 혼자’의 생활을 1년 반 만에 청산하고 세종시에 있는 아파 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 준비를 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사하기 전에 깨지기 쉬운 병 종류와 아내가 아끼는 가방을 자가용으 로 따로 옮겼는데 생각보다 가방이 많더군요. 아내가 직접 산 것은 별로 없고,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제가 선물한 것들입니다. 가방 은 더스트백으로 싸인 채 보호를 잘 받고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사랑하는 귀한 물건임이 틀림없을 겁니다. 대부분의 여자들도 사랑하는 물건이겠지요.


그렇다면 남자들이 사랑하는 물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십수 년 전에는 카메라, 오디오, 자동차 등이 주 종목이었습니다. 남자들은 좋은 카메라나 오디오를 갖고 싶어 했고, 경제적 여건이 허락만 된다면 좋은 차를 갖고 싶어 합니다. 차에 대한 남자들의 로망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턴테이블.jpg < 턴테이블과 스모키 앨범 >

1991년에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경남 거제시에 교사 초임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봉급이 60만 원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둔덕면 소재의 어느 집의 방 2개짜리 아래채를 혼자 썼는데, 월세 5만 원이었습니다. 외양간을 개조해서 만든 방이었는데 그 작은 방에 90만 원에 구입한 인켈 전축이 있었습니다. 가끔 레코드판을 올려 팝송을 들으며 월세방에 어울리지 않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맛도 있었고요. 어쩌다 놀러 오는 친구들이 무척이나 부러워했습니다. 본체와 스피커를 나란히 놓으면 싱글 침대만큼 컸습니다. 요즘에는 그만한 크기의 전축을 보기 힘듭니다.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이죠.


시대가 변하면서 남자들이 좋아하고 갖고 싶어 하는 물건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카메라나 오디오는 예전의 명성을 이어가지는 못합니다. 요즘 스마트폰의 카메라와 스피커는 예전의 카메라와 오디오만큼의 좋은 성능을 가졌으니까요. 스마트폰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하면 별도의 오디오가 필요가 없죠. 일부 마니아들은 여전 히 커다란 오디오를 찾기도 하지만 예전만 못합니다.


물건에 담긴 의미

최근에는 사람들의 취미나 관심이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이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부지런히 연결해 줍니다. 비슷한 취미나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온/오프라인에 모여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이죠. 동호회 활동이 다양해지면서 남자들이 좋아하는 물건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카메라, 오디오, 자동차뿐만 아니라 자전거, 골프, 야구, 등산 등 스포츠 활동이나 IT 기술, 요리, 독서, 여행, 패션, 뷰티, 문화예술 등 동호회의 종류가 많아지면서 그에 따른 ‘물건’도 다양해졌습니다. 다양해졌다는 건 그만큼 사람들이 생활의 여유가 생기고 삶의 질이 높아졌다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덕후’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덕후는 일본어인 ‘오타쿠’를 한국식 발음으로 바꿔 부르는 말입니다. 197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말인데 원래는 집이나 댁(당신을 높여 부르는 말)을 뜻합니다. 원래의 뜻이 조금 변해 집안에 틀어박혀 취미 생활을 하는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근래에는 마니아 이상의 열정을 가진, 전문가보다 더 전문가적인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덕후’라고 부릅니다. 배우 심형탁은 만화영화 캐릭터인 ‘도라에몽’ 덕후로 유명합니다. TV를 통해 보니 그가 사는 집에 엄청난 수의 도라에몽이 있더군요. 그의 근육질 몸매와 도라에몽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그의 도라에몽 사랑은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물건’, ‘나의 물건’은 무엇인가 생각을 해 봅 니다. 생일선물로 아내에게서 받은 일명 ‘백대가리’로 불리는 몽블 랑 만년필, 핸드 드립 커피를 배우면서 구입한 핸드밀, 골프채 중에서 특히 애착이 가는 스카티 카메론 퍼터,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창원으로 다시 내려가면서 큰 맘먹고 산 일룸 마호가니 책상, 그리 고 새 책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주고 산 츠베탕 토도로프의 『일상예찬』, 김훈의 『자전거 여행 1, 2』 등 중고 책 몇 권. ‘나의 물건’은 만년필, 핸드밀, 퍼터, 책상, 책들인데, 이런 물건들은 제가 좋아하는 것이 독서, 커피, 골프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물건은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삶의 즐거움과 의미를 찾는 그 무엇이라는 의미입니다.


IMG_0077.JPG < 커피 그라인드, 핸드밀과 전동밀 >

글을 쓰기 위해 초안을 잡을 때 만년필로 종이에 글을 쓰면 왠지 정리가 잘 됩니다. 이런저런 생각도 잘 떠오르는 것 같고요. 아침저녁으로 커피를 자주 내립니다. 핸드밀로 커피를 갈면 커피콩이 으깨지는 소리와 냄새가 손으로 전해집니다. 그렇게 내린 커피가 더 향기롭습니다. 가끔은 퍼팅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헤드 부분이 여기저기 찍힌 10년이 넘은 그 퍼터를 들고 그린에 올라 가면 언제나 원 퍼팅으로 마무리를 할 것만 같습니다. 주말 이른 아침에 혼자 일어나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합니다. 책장의 미술 코너에 자리 잡은 몇 권의 중고 책들은 가끔 표지를 만져 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이야기를 쏟아 냅니다.


실제로 제가 생각하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글이 더 잘 써진다는 것, 커피 맛이 더 향기롭다는 것은 모두 저의 상상일 뿐 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은 그 물건들이 소중한 의미로 제게 다가오고, 보이지는 않지만 무언가를 전해 주고 있다는 의미겠지요. 그건 아마도 편안함과 익숙함, 그런 것을 통해서 얻게 되는 만족감이 아닐까요?


김정운의 『남자의 물건』에 나오는 사진작가 윤광준은 모자를 사랑하는 남자입니다. 그는 모자를 쓰면서 “어때? 잘 어울려?”라고 질 문을 하는 사람은 모자를 쓸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남들이 자신 이 쓴 모자를 어떻게 생각할까, 어색하지나 않을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을까,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은 모자를 쓸 자격이 없다는 거죠. 주체적 자아를 가지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IMG_0080.jpg < 김갑수의 물건 >

시인 김갑수는 음악을 들을 때 꼭 마셔야 하는 커피를 맛있게 해 주는 커피 그라인더를 가졌고, 교수였던 김정운은 생각을 정리해 주는 만년필을 여러 개 가지고 있습니다. 축구감독 차범근에게는 독일 시절의 추억을 떠올려 주는 계란 받침대가, 얼마 전에 작고하신 신영복 선생에게는 벼루가 있습니다. 이처럼 물건에 집착하는 이유를 시인 김갑수는 대상에 함몰함으로써 존재론적 자아를 잊어버리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존재론적 자아에서 벗어나면 돈이나 명예, 지위 등에서도 벗어나게 되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죠. 존재론적 자아를 잊어버리고 주체적 자아로 나아가는 좋은 방법이 바로 물건에 몰입하는 이유랍니다.


행복하지 못하는 이유

김정운은 즐거운 삶, 행복한 삶을 주장합니다. 『나는 아내와의 결 혼을 후회한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에서 한결같이 하는 말입니다. 행복하지 않은 삶은 무효라고 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왜 사느냐고, 어떤 삶이 좋은 삶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행복한 삶’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행복하냐고 다시 물으면 자신 있게 행복하다고 대답하지 못합니다. 2016년에 발표된 세계 행복지수 국가별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58위에 올랐습니다. 행복지수를 통해서 순위를 매기는 것인데, 실제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열 명 중 한두 명 정도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특히 한국 남자들은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는데, 그 이유가 타 인의 눈을 의식하며 살기 때문이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볼까, 늘 걱정하고 의식해서 그렇답니다. 옷차림새, 머리 모양뿐만 아니라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종 류, 사는 아파트에 대해 남의눈을 의식하고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내가 가진 것과 다른 사람의 것을 비교해서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판단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좀 나은 것이라 생각되면 만족감을 느끼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늘 나보다 나은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옛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큰 것, 더 좋은 것, 더 비싼 것을 욕망합니다. 존재론적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행복할 수가 없는 이유입니다.


머리 좀 길게 길러 볼 걸

이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날을 잘못 잡아 미장원을 찾아 한참이 나 돌아다녔습니다. 매월 넷째 주 일요일은 쉬는 곳이 많다는 걸 깜빡한 탓입니다. 늘 가던 곳에 가면 길이는 어떻게 하고, 옆머리는 어떻게 해달라는 등 이것저것 설명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합니다. 그래서 늘 가던 곳으로 가는 편인데 하필이면 그날이 그 미장원의 휴일이었습니다. 그곳뿐만 아니라 근처의 다른 곳도 휴일이라 내일로 미룰까 하다가 밖에 나온 김에 이발을 했습니다. 머리카락은 좀 길어서 이것저것 설명을 해줘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일명 스포츠형이라고 해서 짧게 자르고 다녔습니다. 짧게 자른 머리를 해도 보기에 나쁘지 않았고 관리하는 데도 좋으니까요. 관리랄 것도 없죠. 그냥 자주 자르지 않아도 되니 이발비도 적게 들고, 아침에 세수할 때 물만 묻혀 닦아 버려도 되니 편하다는 의미입니다.


나이 들어 너무 짧은 헤어스타일은 남 보기에 좀 민망하다는 아내 말도 있고, 갈수록 머리숱이 적어져 밑이 보이는 것도 감출 겸 제법 길렀습니다. 그런데 긴 머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옆 머리카락이 귀를 덮는 것이 자꾸 거슬립니다. 아침마다 머리를 감고 말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마음에 걸립니다. 아내는 파마를 해서 웨이브를 주면 관리하기 편하다고 파마를 해보라고 권하는데 쉽게 마음이 움직이질 않습니다. 아내가 억지로라도 미장원에 같이 가주면 못 이기는 척해 볼 요량인데, 혼자 가라고 하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긴 파마하려고 몇 시간 동안 머리에 뭘 뒤집어쓰고 있을 자신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걱정도 됩니다. 머리 모양 하나 제 맘대로 하고 다니기 쉽지 않습니다.


2004년에 이집트 카이로에 한국 학교장으로 파견을 나갔을 때, 그곳에 가면 꼭 해 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보는 거였습니다. 머리를 길게 길러서 긴 머리카락을 고무줄 등으로 묶어 보고 싶었거든요. 특별히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해 보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늘 짧은 머리를 하고 있어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외국이니 분위기도 좀 자유로울 거라는 생각도 했고요. 그런데 결국 길러보지 못했습니다. 머리카락을 기르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그곳 분위기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곳 교민사회가 꽤나 보수적이었고, 저 스스로가 자기검열을 한탓도 있고요. 교민사회가 크지 않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지냅니다. 게다가 한국에서 파견을 나온 학교장 등 기관장들은 늘 교민들의 관심 대상입니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특히 아이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더군요.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것이 무슨 잘못은 아니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심리적 압박을 스스로 받았죠. 그래서 결국 길러보지 못했습니다.


이집트 사람이 운영하는 이발소에 가서 ‘단정하게’ 깎고 다녔습니다. 교민들이 자주 가는 곳이라 그런지 간판에 아랍어와 함께 한국말로 ‘이발소’라고 적혀 있습니다. 한국 사람이 가면 젊은 직원이 하지 않고 사장이 직접 이발을 해 줍니다. 비용은 다른 물가에 비해 서 좀 비싼 편이었지만, 생각보다 머리를 잘 깎습니다. 2004년 당시 우리 돈으로 5,000원 정도 했습니다. 휘발유 1L에 250원 정도였으니 그에 비하면 이발료가 비쌌죠. 카이로에 있는 동 안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보지 못한 것이 가끔 후회됩니다. 그까짓 거 뭐라고 그러질 못했나 싶기도 하고, 너무 소심했구나 싶기도 하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주체적 자아로 살아간다는 건 힘든 일인가 봅니다.


남자든, 여자든 좋아하는 물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좋아하고 관심을 가지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김갑수의 말처럼 굳이 존재론적 자아를 잊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물건 속에 나의 일상과 삶, 그리고 추억을 하나둘 쌓아가는 일은 어쩌면 주체적 자아로 살아가는 방법,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일지도 모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배철현, 『심연』, 21세기북스, 2016

고독, 관조, 자각, 용기로 이어지는 성찰의 4단계를 통해 삶은 자신만의 임무를 발견하고 실천해가는 과정임을 알려 준다.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저, 전경아 역, 『미움받을 용기』, 인플루엔셜, 2014

자유로운 삶, 행복한 삶, 지금보다 더 나은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용기라고 설파한다. 미움받을 용기조차 필요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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