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회고, 맨 몸

자본이 없다, 본성을 이해한다, 문제에 직면하다, 돌파한다

by 최새미

2025년은 창업 5년차였지만, 1년차와도 같이 심하게 나를 소모했고, 심하게 기뻐했다. 창업은 bittersweet라는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돈을 투자했고(잔고 걱정을 해야할 정도로),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새로운 멤버들에게 막되먹은 나의 본연의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이렇게 해도되나 싶을 정도로 대부분 순간 갈아 넣었고(매순간이라고 쓰고 보니 그렇게 갈아넣은건 아닐수도..), 뛸듯이 기뻐할 정도로 성과를 만들어냈다.


요약하자면, 이토록 쓰고 달게 한 해를 보냈고, 뒤늦게 회고를 쓰게 된 계기도, 연말연시까지 마무리가 되지 않은 일들 때문에 모든 휴일의 일부를 반납하고(전부라고 쓰고 보니 SUIT도 보고 책도 읽고 한거 보면..), 어떤 건 만족스럽게, 어떤 건 만족스럽지 않게 어떻게든 일단락을 지었다. 잘했든 잘못했든, 무엇이든 레슨런이 될 것이다.


2025년 한 해를 자본이 없다, 본성을 이해한다, 문제에 직면한다, 돌파한다. 맨 몸 밖에 남지 않은 2025년 초, 그때부터 지금까지를 네 개의 짧은 문장으로 정리해 본다.



자본이 없다


자본금이 떨어져가는 상황은 올해 처음이었다. 2022년에 카카오벤처스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4.5억원), 익월에 TIPS자금을 확약받았다 (5억 원), 2024년에 개인투자조합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4억원), 중간에 TIPS연계사업, 창업도약패키지에도 선정됐다 (3억 원). 각종 수출지원사업도 여러 개 선정됐으니, 아마 회사 창업이래 유치한 자금만 16~17억 원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5년 유지하는 인건비 + 임대료에는 터무니없이 못미치지만, 그래도 살만 했다. 우리는 수익이 나고 있었으니까, 적당히 말이다.


처음에 카카오벤처스 담당심사역과 먼슬리 리뷰를 할 때마다 체크하는 재무상태표의 이상한 점은, 돈이 줄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투자시점엔 세 명이었고, 투자유치 직후 5명이 되었다가 아주 오랜시간에 걸쳐 7~10명이 됐다. 법인 전환 초기에 연봉을 극도로 적게 받았던 나와 진은 TIPS 유치 후 그나마 대기업 신입사원 정도는 받을 수 있게 됐고, 어, 회사가 돈을 이만큼이나 주네 느낌으로 즐거워했었다. 여러 지원사업에서 투자금 이상을 지원해주니, 고민없이 인력을 채용하고, 개발을 할 수 있었다.


이게 이었다면 독이었을거다. '우리는 이미 흑자야' 같은 헛된 메시지로 안분지족하는, 로컬옵티멈이 주는 달콤함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2024년, 인원이 15명까지 늘어나서야 이 중 10명은 1인분을 못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면 각자 70%는 다른 데 애를 쓰느라 시간을 쓰고 있었는데, 그 70%는 안타깝게도 비지니스와 프로덕트가 발굴되고 개선되는데 기여하고 있지 않았다. 초기 문제-해결 프레임워크가 작동하지 않는데, 거기에 마케팅 영업을 태우면 무슨 소용이람, 나는 문제풀이에 집중하자고 0.7의 언저리 일 이라는 제목의 팀 레터 같은 것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손을 대야할 지 몰랐던 거 같다.


아무튼 2024년에 적자가 3억 정도 발생했고, 재고가 쌓였다. 한해 운영자금을 좀 걱정해야할 정도로 잔고에 빨간불이 켜졌다. 제조나 유통을 다루는 사람이면 알 것이다. 거래가 커질수록 현금흐름은 경색된다. 문제는 우리팀이 거래가 커지느라 흐름이 경색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 그냥 인건비 지출이 컸고, 멍청 비용이 컸고, 외부로 향해야 할 각종 비용이 내부에서 녹아내렸다. IT스타트업이라서 인건비가 많이 나갔어요, 하기에는 프로덕트의 완성도가 그것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투자는 이 상황에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심사역의 추천 & 대표님들의 안내로 신용보증기금 퍼스트펭귄에 지원해서 자금을 지원받았다. 사실 예전에 기술보증기금에서 최초의 벤처인증을 받을 때도 소액 대출을 받았었는데, 살면서 큰 대출 한 번 받아본적 없는 내가 대출받는 것 자체에 걱정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좀 더 초기 스테이지의 대표님들 조차도 투자 리스크보다는 대출 리스크를 낮게 평가하고 있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생각보다 괜찮았고, 예비자금으로 유동성을 확보하는게 회사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1월 초 들어왔던 퍼스트펭귄 자금은, 사실 올해도 매출 실적을 달성해서 추가 대출이 되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자금은 더 받지 않을 생각이다.



본성을 이해한다


그리고 나의 본성, 일을 하는 사람들의 본성, 고객의 본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자금을 좀 돌리고, 새로운 팀원의 합류를 위해서 하는 절차들을 보완했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프로덕트 속성의 팀원 몇 명이 큰 힘이 됐다. 여기서 알게 된 것은, 내가 심지가 굵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사실 주변의 영향을 꽤 많이 받는 사람이고, 내가 마음대로 좋을대로 설쳐야 좋은 회사가 되는 거 같다는 거다. 어쨌든 팀내 메이커가 많이 늘었고, 내가 마음대로 해도 뭔가 이해와 지지를 받는 상황이 이어졌고, 기분이 좋았고, 더 열심히 했다.


철없지 않은가ㅠㅠ! 기분이 좋아서 열심히 했다니. 팀원들에게 미안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팀원들의 마음도 이해하려고 많이 원온원을 했다. 이거는 정말 본연의 나라면 억지로 내 스케줄에 끼워넣은 것인데, 막상 하고 보면 재밌었다. 좋은 말만하고, 겉돌고, 버티기 위해 하는 얘기가 아니라. 샘 그건 좀 아닌데, 샘 이 방향이 더 맞다고 생각해요, 하고. 의견을 내줬다. 나는 돈&인원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당분간은 우리가 다 해야해요, 라고 방어적으로 말한 적도 많다. 뭘 가리고 더 잘 보이고 할 힘도 없어서, 그냥 솔직히 다 얘기했다. 고맙게도 어쩔 수 없으면 다 해야죠! 하면서 훗 웃으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땜빵의 인원을 들이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았다. 가장 좋은 복지가 스마트한 사람들과 일하는 것인 사람들임을 알고 내가 합류를 제안했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모두 나와 이야기하기를 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맘에 들어서 함께하는 것일테니 말이다. 아마 내가 스마트하다고 속았을테지.


바이어들도 나름 업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많아서, 많은 부분에 이야기가 통했다. 처음에 고객개발을 맨 몸으로 하겠다고 들어가서, 인계받기도 하고, 발굴하기도 하고, 얼기설기 온보딩콜도 하고(지금 너무 많이해서 영어 너무 잘해졌다..).. 바이어의 마음을 이해했고, 선을 긋기보다는 왜 이 사람들이 이 문제에 이토록 집착하는 지를 이해하려고 한 거 같다. 먹고 살기 위해. 라는 뻔한 답이 있지만 어떤 비지니스의 순간에서는 이 먹고 살기 위해가 굉장히 여러가지 다른 말과 행동으로 드러난다. 패션으로 창업한 사람도 가끔 본적은 있는데, 일단 해외 바이어들도 엄청 열정적으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팀을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팀을 떡상시키고 좀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문제에 직면하다


올 해 가장 맨몸스러운 부분은 바로 이 거다. 그동안 고객의 히스토리를 다 쌓아온 멤버들을 독립시키거나, 창업한다고 해서 내보내고, 내가 사업개발을 사실상 이끌어가야하는 상황이 됐다. 비즈데브 관련 리더가 없는 상황에서... 평생 기획과 만들기만 했다만, 그래도 잇몸으로 막고, 어느정도 체계화하는 데는 자신있는 창업가아닌가! 일단 시작점은 고객개발에 방점을 찍었고 일단 이야기해보기를 권유한 린스타트업의 정신을 이어서 진행해봤다. 편견없이 듣기, 이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하고 싶은 말 알기, 우리가 본질적으로 해결해줘야하는 것 알기... 생각보다 기자시절 인터뷰를 하던 때와 비슷했다. 과학기자라서, 과학자를 인터뷰할 때 선배들한테 깨지면서 배운 주제파악능력은 "오 너는 좀 다르네!" 하는 인터뷰이의 만족감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굵직한 고객들이 장기고객으로 전환되면서, SEOUL4PM 성장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 다음 시작한 것은 고객에게 제공되는 선주문방식(발주를 넣고, 대기하고, 확정을 받은 후 물건을 배송받는)을 이해시키고, 효용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프로세스화하는 것이었다. 우리팀 믿음직한 비즈데브 멤버인 에릭과 엠마는 고객의 오더시점부터 발주시점까지 왔다 갔다하면서 중개무역을 한국인의 똑똑함으로 막고 있었다. 그동안 인보이스 자동화 같은 기능이 조금씩 개발은 됐지만, 전자동무역은 아마 엄청 먼 미래같다고 느꼈을수는 있을거 같다.


하반기에는 메이크 고객개발을 다시 시작했다. 아픈 손가락같은 메이크, 레나라는 훌륭한 멤버가 최초의 발주전환부터 히스토리를 많이 쌓아줬다. 하지만 그 히스토리를 물려받으면서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 상황에 부딪쳤다.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 수준의 맥락적이고 관리적인 부분이 훨씬 많았던 거다. 유저관점을 중시하는 디자이너 민지와 고군분투했다. 발주도 넣기만 하는게 되는게 아니었다. 여러 개를 합쳐야 하나가 되고, 여러 개의 스케줄 사이의 아다리가 맞아야(!) 프로젝트가 성립된다. 지금의 파트너사들도 베스트 케이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탐색기간에도 모든 케이스가 패턴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했을 때 솔직히 절망스럽기도 했다.


메이크에 대한 대화는 여기서 > 메이크9차전, 메이크6차전, 엠마<>샘 메이크톡




돌파한다


SEOUL4PM | 관찰하다가 일단 비즈데브의 절반, 발주부분을 떼내왔다. 그리고 벤더, 브랜드사에 직접 발주서를 넣으면서 문제를 파악했다. 생각보다 너무 문제가 많은 시장이었고, 이것은 고객의 문제라기 보다는.. 시장의 문제였다. 다수의 참여자가 제각각 비지니스를 하고 있었다. 주문을 했고, 확정을 받았고, 돈을 냈고, 돈을 선금으로 냈는지 후금으로 냈는지, 상품이 수량대로 도착했는지 아닌지. 이런 기초적인 트래킹이 불가능했고, 그랬기 때문에 똑똑한 한국인이 성실히 해결하고 있었다. 국내공급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해외공급도 지연되는, 그리고 이 공급망 파이프라인이 개선되지 않으면 리드타임, 상품확보 등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겨 광고고 마케팅이고 뭐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문제를 파악했다. 한 명이 발주를 관리하면 문제가 없는데 발주관리자가 2명이 되는 순간 많은 것이 엉키기 때문에, 왜 중개무역상들이 군소하게 파편화되는지도 이해하게 됐다.


발주관리의 관리라는 우스운 이름의 시트를 만들어서 발주를 관리했고, 언제 발주된 어떤 물건이 어떤 태그를 달고 어떻게 확정되고, 창고에 쌓여서, 발주대기 상태가 되는지 오퍼레이션을 돌리면서 시트에 웅장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특정발주에 이름을 붙여 결제해서 결제 체크도 용이하게 바꿨다. 3개월 정도 더 돌리면서 모델링 한뒤에 제프가 더 훌륭하게 정리하여 스펙화하였고 지금 서울포피엠은 고객의 발주가 등록되면, 자동으로 발주가 들어가고, 확정이 되면 자동으로 결제를 받고, 창고에서 발주대기상태가 된다. SCM에서는 무엇을 출고시켜야 하는지 날마다 노티받게 되면서 국내에서 쏘기 전까지의 중개무역이 파이프라인화 됐고, 데이터 전환됐다.


마치 데이터산업혁명이랄까. 가내수공업에서 공장 파이프라인이 들어오고, 그것만 하는 사람이 생기면 생산성은 증폭된다. 우리는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만들고, 특정 데이터 지점에 서서 비지니스 오퍼레이션과 데이터만 관리하는 롤을 정의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하는 부분이라 스케일업이 어렵다는 편견이 가득한 이 중개무역시장에서, 목표로 지향하던 무역자동화가 이뤄진 것이다(물론 자동화도 %는 측정해야한다).


Mayk | 레나가 출산휴가를 갔고, 그가 없다고 생각하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정말로 Mayk를 맨 몸으로 부딪쳤다. 뭔가 투자받은 아이템이고, 그래서 이것저것을 시도하다보니(특히 채용까지 했을땐) 본질을 흐리는 데이터가 여기저기 많이 끼어 있었다. 진정성없이 정보캐내기식으로 찔러보는 고객들이 그랬고, 소량발주 고객들이 그랬고, 합리적으로 관리하지 못하는 우리 문제도 있었고.


Mayk Universe라는 웅장한 시트를 만들어서 추적을 다시 시작했다. 일단 레나가 진행해온 프로젝트 데이터를 참고했고, inquiry를 날것대로 열어 새로운 고객의 요구사항을 잘 들어보고 전체적인 문제를 새로 보려고 노력했다. 리드타임 문제가 있는 파트너사도 갈아끼웠다. 작년에 새로산 차가 9월까지는 주행거리가 5,000km였는데 11월에 15,000km가 됐으니, 참 열심히 다녔다. 안되는 것을 부탁하기 위해, 되는 것을 잘 못해서 서운한 파트너 / 고객들에게 Sorry for the delay라며 무릎꿇기도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수 개의 프로젝들을 돌리고, 수십개의 화장품 품목을 만들고 나니 프로덕트로 무엇을 풀어야 하지? 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여전히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 있고(많은 수요, 자동화되지 않은 레거시 플레이어,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제조문화), 우리가 경험과 자금 문제로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판단. 상당한 데이터를 쌓아서, 이 데이터를 날것대로 펼쳐두고, 멤버들과 좋은 방향으로 전략화할 예정이다.




맨몸이라고 썼지만, 이 모든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팀원들의 지지와 이해 때문이었다. 내가 여기에서 저기에서 일하다보니 지금 팀원들에게 가장 많이 요구받는 것은 원팀에 대한 갈망이다. 프로덕트가 2개이고, 2개의 프로세스가 상이하게 돌고 각각에서 최적화가 된다. 다들 친하긴 하지만 서로의 맥락을 모르고. 대체도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두 개의 프로덕트를 운영하는 팀들이 겪을 수 있는 문제라고 여겼다. 그리고 트랜잭션 텀이 길고 분산된 중개무역 특성상, 분리되어서 발생하는 단절과 산만함은 어쩔 수 없다고 느낄때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로 수십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그건 그냥 내가 약하게 마음먹고 한 소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통합적인 회사의 비전을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얼라인이 맞는다면, 원팀으로 같이 일하는 건 누가 어떻게 하느냐의 구현문제일 뿐.


낮출수록 높아지는 평범한 순리가 있다. 2026년에는 통합적이고 높은 수준의 그림을 그린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어떤 하루에는, 좀 더 바닥으로 돌아가, 더 겸손하게 갈고 닦는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2026년 어떤 시점에 이 글을 봐도, 그 순간 적어도 나 스스로는 오늘도 굉장히 바닥에서 노력한 날이었다고 평가하고 있길 고대한다.



2025 치열하게 고민하며 열정적으로 일을 만들어 온 팀원들, 함께해서 고마웠고, 영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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