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어제저녁부터 오늘 아침 지하철 출근길 지금까지. 알 품은 새가 둥지에 앉아 있는 듯이, 생각은 마음에걸렸다. 비 내리고 바람 불어 낙엽이 흩어지고 떨어지는 거리를 걸었다. 가을비를 즐기며 한강이 주는 선물을 품에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10월 중순이다. 거리는 계절의 쓸쓸함을 벌써 준비하고 있다. 나뭇잎은 벌써 말라가며 초록을 잃어버렸다.염색한 머리카락이 누렇고 붉게 변해 가듯이. 힘 빠지고 늙어가는 인간의 모습이 가을 잎을 닮았다. 지금은 애써 잎 밑동을 힘주고 쥐고 있지만, 찬바람이 불면 곧 떨어질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궤적을 들여다본다.그리고 살아가야 할 어렴풋이 비치는 먼 길을 응시하기도 한다.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세상에 던져져바둥거리며 살다가 여기까지 왔다. 지나간 그 길을 알기에 남아있는 앞길이 두려워진다. 세월 속에 묻혀 지워지고 있는 과거를 지켜보며 안도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남긴 불안이 여전히 마음에 살고 있다. 잘 사는 것이 무엇일까? 답도 없는 질문들을 자꾸만 뇌 까이며 비 오는 길을 걷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해답을 아스팔트 위에 쏟아부어 줄지도 모른다고 애써 되뇌고 있다.
한강의 예전 인터뷰가 생각난다. "이 세상에는 폭력과 고통이 가득하지만, 동시에 선하고 아름다운 양심도 있습니다." 그녀는 '채식주의자'에서, '소년이 온다'에서,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스웨덴 한림원이 말한 것처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을 그려 넣었다. 우리 인간은 왜 이렇게 악한 것일까? 이데올로기, 권력을 위해서 상대를 왜 무참히 부러뜨리는 걸까? 좋은 머리로 만든 살상무기로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일까? 지금도 가자에서, 레바논에서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죽음은 이어지고 있다. 그 악한 인간도 가장 연약한 한 인간이다. 무서운 몬스터 앞에 선 연약한 인간의 모습 앞에서 한강은 울고 절망하고 까무러 치고 힘들어했다. 무슨 다른 희망은 없는 것일까? 그냥 희생당하고 찢지고 죽어야 하는 것인가? 채식주의자 주인공처럼 죽어서 나무가 되어야 하는 것뿐인가?
아무리 성냥을 그어도 불붙지 않는다. 숨을 들이마시고 그어도 불붙지 않는다. 이 세상은 연약한 한 줌의 생명에 베푸는 자비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머무를 수 없다. 숨을 다시 가다듬고 힘차게 성냥을 다시 내리쳤다. 성냥개비가 부러져 버렸다. 세상을 누비는 악은 작은 생명에 배려가 없다. 불꽃을 피우려 하자 성냥개비를 끊어 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갔던가? 포악한 몬스터가 광주를 덮고 도살하고 고문했다. 제주에서는 3만의 양민이 잔혹하게 학살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도 가자에서는 4만 명이 죽어 나가고 있다. 또 우크라이나는 어떤가? 성냥개비는 그렇게 부러져 나간다. 그러나 한강은 포기할 수 없었다. 부러진 성냥개비를 들고 다시 힘을 다해 그었다. 불꽃이 일었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불꽃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