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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Essay

희랍어 시간

by 동이화니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것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 잠길 수 있다는 것


한강의 말처럼, 정말 이상해요. 하나님이 얼굴에 눈과 입을 만들었다는 사실. 눈에는 눈까풀이 있고 입에는 입술을 만들었지요. 우리는 눈까풀을 닫을 수도 있고 입술을 오므려 말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내가 내 의지로 그것들을 단단히 걸어 잠글 수도 있지요. 때때로 외부의 구속이 눈꺼풀과 입술을 밖에서 닫아 버릴 때도 있지만요.


세치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들. 헐거운 말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 들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찼다.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


내 입에서는 지금까지 어떤 말들이 쏟아져 나온 걸까요? 헐거운 말들, 남을 수없이 찔렀던 말들, 때로 쇳냄새가 나는 거친 말들이었지요. 그것들은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고 있었어요. 다름 아닌 내 소중한 사람들 에게로. 심지어 내 아내와 내 딸들에게 떨어질 때도 있었어요. 그리고 나를 찔러 댓 지요.


셀 수 없는 혀와 펜들로 수천 년간 너더너덜 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더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 한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무딘 파편들이 발등에 떨어졌다. 팽팽하게 맞물려 돌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끈덕지게 마모된 한 자리가 살점처럼, 숟가락으로 퍼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 나갔다.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쓰잘데 없는 글을 써 질렀습니까? 나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그 아름다운 것들을 너덜너덜 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들 때문에 늙은 심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덕누덕 기워지고 바싹 말라 물기 없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더 힘껏 움켜쥐었지요. 그 무딘 파편들은 우리 마음을 갈아 대며 닳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자리는 숟가락으로 떠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 나갔어요. 살점이 떨어져 나갔어요.


태연하게 내 혀와 이와 목구멍으로 발음된 모든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공간의 침묵에 공포를 느껴요. 한번 퍼져 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단어들에 공포를 느껴요.


정말 그래요. 한강의 말처럼 내가 뱉어냈던 수많은 말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흩어졌던 공간의 침묵이 무서워요. 그 침묵들이 나의 과거를 다 담고 있지요. 다시 돌이 킬 수 없는 뱉어진 말들, 내가 얼마나 많은 나쁜 소리들을 이 공간에 쏟아 내었을까요?




그녀는 말을 잃어버렸어요. 아니 어쩌면 말들을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수없이 뱉어왔던 너절 너절한 말들에 환멸과 공포를 느꼈지요. 그래서 입술을 닫아 버렸지요. 내 말들이 떠 돌아다니는 침묵의 공간들이 무서웠어요. 무섭게 변해 버린 늙은 심장에서 쏟아질 말들이 두려웠어요. 말을 잃어버린 그녀는 희랍어를 배우기로 했지요. 이 언어는 언어가 세분화되기 전의 고대 언어지요. 희랍어는 문법체계가 복잡하고 중의적 표현과 어법이 많다고 하네요. 예를 들면, '칼레파 타 칼라' 그 뜻은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이 세 가지랍니다. 고대 희랍인에게는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같은 관념이었답니다. 그리고 '배워 깨닫다'라는 단어와 '수난을 겪다'라는 단어가 첫글자만 다른 같은 곳에서 파생된 것 이랍니다. 배움이라는 것은 엄청난 수난을 동반하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녀는 이런 희랍어를 무척 사랑했는가 봅니다.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희랍어 강사입니다. 독일에서 희랍어를 전공했습니다. 그는 점차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강의실로 찾아가다 건물 안에 들어온 새 때문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안경이 날아가 깨지는 사고를 만납니다. 그때 그의 강의를 듣는 말을 잃어버린 그녀를 만나게 됩니다. 볼 수 없는 남자와 말을 할 수 없는 여자는 만났습니다. 그가 사는 어두운 단칸방에서 그들은 어둠의 대화를 시작합니다. 침묵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기척을 내는 것뿐이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이고 머리를 쓸어내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침묵을 헤치며 계속되었습니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볼 수 있을까요? 말할 수 없는 침묵으로도 우리는 소통할 수 있는 걸까요? 사랑은 어둠과 침묵도 뛰어넘을 수 있는 걸까요?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한강 소설처럼, 그저 곁에 있어주는 따뜻한 작은 기척이면 충분한 것일까요?


다음은 이 책의 마지막 장 '심해의 숲'입니다. 그들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말하지 않음과 보지 않음이 주는 슬픔과 환희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바다 아래의 숲에 누워 있었어요/ 빛도 소리도 그곳에는 없었지요/ 당신이 보이지 않았어요/ 나 자신도 보이지 않았어요/ 당신은 소리를 내지 않았어요/ 나도 소리를 내지 않았어요/ 마침내 당신이 아주 작은 소리를 낼 때까지/입술 사이로/둥글고 가냘픈 물거품이 새어 나올 때까지/

우리는 그곳에 누워 있었어요/당신은 간절했지요/무섭게 고요했지요/ 어두웠지요/밤이 저문 다음 찾아오는 더 깊은 밤처럼/수압 때문에 모든 생물들의 몸이 납작해진 심해처럼/

한 순간 당신의 검지 손가락이 내 어깨의 살갗 위를 움직이여 썼지요/숲, 숲이라고/난 다음의 말을 기다렸어요/다음의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 눈을 뜨고 /어둠을 들여다보았어요/어둠 속에 희끗하게 번진 당신의 몸을 보았어요/그때 우리는 아주 가까이에 있었지요/아주 가까이 누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어요/

빗소리가 멈추지 않았어요/무엇인가가 우리 내부에서 깨어 젔지요/빛도 목소리도 없는 그곳에서/수압을 견디지 못해 산산 조각난 산호들 사이에서/우리 몸은 이제 막 떠오르려 하고 있었지요/그대로 떠오르고 싶지 않아서/당신의 목에 팔을 감았어요/당신의 어깨를 더듬어 입 맞추었어요./내가 더 입 맞출 수 없도록 /당신은 내 얼굴을 껴안으며 작은 소리를 냈지요/처음으로/거품처럼 가냘프게, 둥글게/

나는 숨을 멈췄어요/당신은 계속 숨을 쉬고 있었어요/겨우 당신의 숨소리가 들렸어요/그때부터 우리는 서서히 떠 올랐지요/먼저 수면의 빛에 어렴풋이 닿고/그다음부터는 뭍으로 거세게 쓸려갔어요/

두려웠어요/두렵지 않았어요/울음을 터트리고 싶었어요/울음을 터트리고 싶지 않았어요/내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기 전에/당신은 나에게 천천히 입 맞추었지요./이마에/눈썹에/두 눈꺼풀에

마치 시간이 나에게 입 맞추는 것 같았어요/입술과 입술이 만날 때마다 막막한 어둠이 고였어요/영원히 흔적을 지우는 눈처럼 정적이 쌓였어요/무릎까지, 허리까지, 얼굴까지 묵묵히 차 올랐어요.


더 적게 말하고 더 적게 보아야 하겠습니다. 소중한 것으로 보고 귀하게 말하며 살아야 할 것 갔습니다. '희랍어 시간'을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모국어로 읽는 기쁨이 너무 컸습니다. 다시 한번 더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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