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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이화니 Oct 27. 2024

희랍어 시간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것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 잠길 수 있다는 것


한강의 말처럼,  정말 이상해요. 하나님이 얼굴에 눈과 입을 만들었다는 사실. 눈에는 눈까풀이 있고 입에는 입술을 만들었지요. 우리는 눈까풀을 닫을 수도 있고 입술을 오므려 말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내가 내 의지로 그것들을 단단히 걸어 잠글 수도 있지요. 때때로 외부의 구속이 눈꺼풀과 입술을 밖에서 닫아 버릴 때도 있지만요.


세치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들. 헐거운 말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 들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찼다.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


내 입에서는 지금까지 어떤 말들이 쏟아져 나온 걸까요? 헐거운 말들, 남을 수없이 찔렀던 말들, 때로 쇳냄새가 나는 거친 말들이었지요. 그것들은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고 있었어요. 다름 아닌 내 소중한 사람들 에게로. 심지어 내 아내와 내 딸들에게 떨어질 때도 있었어요. 그리고 나를 찔러 댓 지요.


셀 수 없는 혀와 펜들로 수천 년간 너더너덜 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더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 한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무딘 파편들이 발등에 떨어졌다. 팽팽하게 맞물려 돌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끈덕지게 마모된 한 자리가 살점처럼, 숟가락으로 퍼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 나갔다.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쓰잘데 없는 글을 써 질렀습니까? 나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그 아름다운 것들을 너덜너덜 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들 때문에 늙은 심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덕누덕 기워지고 바싹 말라 물기 없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더 힘껏 움켜쥐었지요. 그 무딘 파편들은 우리 마음을 갈아 대며 닳게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자리는 숟가락으로 떠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 나갔어요. 살점이 떨어져 나갔어요.


태연하게 내 혀와 이와 목구멍으로 발음된 모든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공간의 침묵에 공포를 느껴요. 한번 퍼져 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단어들에 공포를 느껴요.


정말 그래요. 한강의 말처럼 내가 뱉어냈던 수많은 말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흩어졌던 공간의 침묵이 무서워요. 그 침묵들이 나의 과거를 다 담고 있지요. 다시 돌이 킬 수 없는 뱉어진 말들, 내가 얼마나 많은 나쁜 소리들을 이 공간에 쏟아 내었을까요?




그녀는 말을 잃어버렸어요. 아니 어쩌면 말들을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수없이 뱉어왔던 너절 너절한 말들에 환멸과 공포를 느꼈지요. 그래서 입술을 닫아 버렸지요. 내 말들이 떠 돌아다니는 침묵의 공간들이 무서웠어요. 무섭게 변해 버린 늙은 심장에서 쏟아질 말들이 두려웠어요. 말을 잃어버린 그녀는 희랍어를 배우기로 했지요. 이 언어는 언어가 세분화되기 전의 고대 언어지요. 희랍어는 문법체계가 복잡하고 중의적 표현과 어법이 많다고 하네요. 예를 들면, '칼레파 타 칼라' 그 뜻은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이 세 가지랍니다. 고대 희랍인에게는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같은 관념이었답니다. 그리고 '배워 깨닫다'라는 단어와 '수난을 겪다'라는 단어가 첫글자만 다른 같은 곳에서 파생된  랍니다. 배움이라는 것은 엄청난 수난을 동반하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녀는 이런 희랍어를 무척 사랑했는가 봅니다.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희랍어 강사입니다. 독일에서 희랍어를 전공했습니다. 그는 점차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강의실로 찾아가다 건물 안에 들어온 새 때문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안경이 날아가 깨지는 사고를 만납니다. 그때 그의 강의를 듣는 말을 잃어버린 그녀를 만나게 됩니다. 볼 수 없는 남자와 말을 할 수 없는 여자는  만났습니다. 그가 사는 어두운 단칸방에서 그들은 어둠의 대화를 시작합니다. 침묵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기척을 내는 것뿐이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이고 머리를 쓸어내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침묵을 헤치며 계속되었습니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볼 수 있을까요? 말할 수 없는 침묵으로도 우리는 소통할 수 있는 걸까요? 사랑은 어둠과 침묵도 뛰어넘을 수 있는 걸까요?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한강 소설처럼, 그저 곁에 있어주는 따뜻한 작은 기척이면 충분한 것일까요?


다음은 이 책의 마지막 장 '심해의 숲'입니다. 그들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말하지 않음과 보지 않음이 주는 슬픔과 환희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바다 아래의 숲에 누워 있었어요/ 빛도 소리도 그곳에는 없었지요/ 당신이 보이지 않았어요/ 나 자신도 보이지 않았어요/ 당신은 소리를 내지 않았어요/ 나도 소리를 내지 않았어요/ 마침내 당신이 아주 작은 소리를 낼 때까지/입술 사이로/둥글고 가냘픈 물거품이 새어 나올 때까지/

우리는 그곳에 누워 있었어요/당신은 간절했지요/무섭게 고요했지요/ 어두웠지요/밤이 저문 다음 찾아오는 더 깊은 밤처럼/수압 때문에 모든 생물들의 몸이 납작해진 심해처럼/

한 순간 당신의 검지 손가락이 내 어깨의 살갗 위를 움직이여 썼지요/숲, 숲이라고/난 다음의 말을 기다렸어요/다음의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 눈을 뜨고 /어둠을 들여다보았어요/어둠 속에 희끗하게 번진 당신의 몸을 보았어요/그때 우리는 아주 가까이에 있었지요/아주 가까이 누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어요/

빗소리가 멈추지 않았어요/무엇인가가 우리 내부에서 깨어 젔지요/빛도 목소리도 없는 그곳에서/수압을 견디지 못해 산산 조각난 산호들 사이에서/우리 몸은 이제 막 떠오르려 하고 있었지요/그대로 떠오르고 싶지 않아서/당신의 목에 팔을 감았어요/당신의 어깨를 더듬어 입 맞추었어요./내가 더 입 맞출 수 없도록 /당신은 내 얼굴을 껴안으며 작은 소리를 냈지요/처음으로/거품처럼 가냘프게, 둥글게/

나는 숨을 멈췄어요/당신은 계속 숨을 쉬고 있었어요/겨우 당신의 숨소리가 들렸어요/그때부터 우리는 서서히 떠 올랐지요/먼저 수면의 빛에 어렴풋이 닿고/그다음부터는 뭍으로 거세게 쓸려갔어요/

두려웠어요/두렵지 않았어요/울음을 터트리고 싶었어요/울음을 터트리고 싶지 않았어요/내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기 전에/당신은 나에게 천천히 입 맞추었지요./이마에/눈썹에/두 눈꺼풀에

마치 시간이 나에게 입 맞추는 것 같았어요/입술과 입술이 만날 때마다 막막한 어둠이 고였어요/영원히 흔적을 지우는 눈처럼 정적이 쌓였어요/무릎까지, 허리까지, 얼굴까지 묵묵히 차 올랐어요.


더 적게 말하고 더 적게 보아야 하겠습니다. 소중한 것으로 보고 귀하게 말하며 살아야 할 것 갔습니다. '희랍어 시간'을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모국어로 읽는 기쁨이 너무 컸습니다. 다시 한번 더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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