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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이화니 Sep 05. 2021

노랑 메모 딱지


올해 내가 산 문구 중 최고는 포스트잇 노트입니다. 간단한 노트가 가능한 명암보다 조금 큰 노랑 딱지입니다. 글씨를 작게 쓰면 8줄도 쓸 수 있게 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내 머릿속에 머물러 있던 짧은 생각들이 거기에 쓰였습니다. 기억하고 싶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 싶은 글들을 그 위에 적었습니다. 책이라는 마법의 동굴 속에서 건져 올린 감동 들이 그 위에 자국을 내며 글적 거려 졌습니다.


난 글자 쓰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필체도 너무 형편없습니다. 내가 쓴 글자 보면 너무 기가 차서 보기도 싫습니다. 남들이 못 알아볼까 걱정되어 써놓은 글자를 자꾸 덧질하곤 합니다. 택배 보내는 주소도 한 번에 써 내려가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싸인 조차도 시원스럽게 써 내려가지 않습니다. 펜글씨 교본 사서 정자로 쓰는 법 다시 배워 볼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 노랑 메모지에 쓰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난 올해 너무 행복했습니다. 너무 좋은 책들 속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세상의 누가 그런 좋은 이야기 해 줄 수 있을까요? 세상의 누가 날 그 신비의 세상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요? 누가 날 위로해 주고 격려하며 용기 줄 수 있습니까? 지하철에서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내가 왜 차를 타고 출퇴근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읽는 즐거움 때문이에요. 음악 좋아하는 내가 오디오 끄는 이유 아십니까? 읽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지요. 연구실에서도 시간 만들어 가며 열심히 펼쳤습니다. 투리 시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퇴근 후 저녁 시간 눈이 아플 때까지 읽었습니다. 얼마나 수많은 글자들이 나와 같이 했을까요?


너무 읽고 싶어 좋아하던 글쓰기도 하지 못했습니다. 긴 글쓰기는 시간 너무 뺏어 가잖아요? 아마 작년의 삼분의 일도 못했을 걸요. 시답지 않은 글보다 읽기가 좋았습니다. 그 대신 새 기쁨이 몰려오면 난 작은 메모지를 잡았습니다. 섬세한 관찰이 만드는 정확한 표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것 다시 한번 기억 속에서 꺼내 써가며 천재들의 유희를 즐겼습니다. 깊은 성찰이 내 뇌리를 건드리며, 감동이라는 물줄기를 만들어 낼 때 난 거기를 나갈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아쉽게 그냥 보낼 수 있습니까? 노란 메모지와 함께 여기 책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기뻤습니다. 감동이라는 전류가 만들어 내는 오묘한 짜릿함. 그 맛을 당신은 아십니까? 그것이 내면을 새롭게 만들고 있는 화학작용을 당신은 경험해 보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노랑 메모 딱지는 그것들이 잠깐잠깐 머물고 간 쉼터입니다.


오늘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노랑 메모 딱지 정리했습니다. 책상에 이곳저곳 붙어 불 꺼진 서재 지키던 그것들, 하나하나 떼어 냈습니다. 지나간 일 년이 거기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지만, 때로는 거칠게 쉼 없이 급류처럼 지나갔지만, 노랑 메모지는 그 속에 글자들을 품에 안고 그냥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흐르는 우주 지키는 북극성처럼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 느낌, 그 감동, 그 이야기를 품고서 거기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엔 내가 좋아한 파우스트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김시습의 이야기도 머물러 있네요. '서로 사랑하고 공경하고 하면서 예를 다하라'는 글귀도 있네요.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이야기도 있네요. 천재 예술가의 거친 일생도 생각납니다. 토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생각나네요. 단 하나의 악과 백가지 선. 그것이 전당포 노파를 죽이잖아요. 주홍글자. 맞아요. 죄와 사랑. 그것이 남긴 분명한 자국들. 내 마음의 화인을 얼마나 아프게 바라보았나요. 호메루스의 영원 고전. 일리아드, 오디세이아. 최고의 서사시 맛 본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올해 역사 이야기 많이 읽었습니다. 배철현 교수의 역사, 종교 이야기.' 인간의 위대한 여정', 페르시아 전쟁을 그린 '그리스인 이야기', 우주의 경이 '코스모스'. 정보의 빅 히스토리 '인포메이션'. 동아시아 중심 위대한 역사 이야기' 실크로드 세계사'. 작가 이름 생각나지 않지만 정말 존경합니다. '적과 흑', '테스'. 그리고 노벨문학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남아있는 나날, 녹턴.' 글이 심플하고 군더더기 없어 좋았어요. 엊그제 읽은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당신의 지성과 예지에 놀랐지요. 그러나 당신의 철저한 무신론을 동의하고 싶지 않아요.

2021년. 난 무엇과 같이 친구 하며 살아갈까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분명한 건, 노랑 메모 딱지 그것과 함께, 우리들 유희를 즐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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