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 저녁이다. 주변은 조용하고 쓸쓸하다. 삭막하다. 세상의 윤곽이 밤의 정령으로 지워지고 있다. 모호하고 흐릿한 물체 위로 검은 베일이 드리워져 간다. 이제 분간이 되지 않는다. 무언가 있었다는 자취의 기억만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았다. 밤안개가 몰려왔다. 차가운 물방울 입자들이 얼굴 표면을 가늘게 쏜다. 그리고 얼굴 주름들 위에서 작은 물길을 만들고 아래로 흘러내린다.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 이기를 넘어선 추위가 그 속에 담겨 있다. 겨울의 냉랭한 한기가 몸을 치더니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 여름의 무성했던 잎도 다 떨어져 버렸다. 바람에 연약한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겨우 붙어 있던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뜨렸다. 바싹 마른 입사귀는 바람 방향으로 서둘러 데굴데굴 굴러간다. 별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배경.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가늘게 떨고 있는 외로운 나무 한 그루. 어둠이 세상을 덮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무대다. 이 무대의 배경은 변하지 않는다. 어제도 오늘도 그대로 그대로이다.
등장인물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 꺼부정한 모습에 깡마른 중년. 싸구려 베레모를 쓰고 있다. 지팡이도 짚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에 모자가 돌아가 버렸다. 감추었던 대머리가 드러나 보인다. 추위에 이빨을 덜덜 거린다. 땅만 바라다보고 있다. 때로 추위 피하려고 가려 지지도 않는 몸을 나무 뒤에 숨기기도 한다. 그는 서성거린다.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다. 누가 오지 않나 소리 죽이며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뚫어져라 이곳저곳 시선을 고정해 응시하기도 한다. 아마 누구를 기다리는가 보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인가? 왜 저기 추운 곳에서 견딜 수 없는 시간의 긴 오랏줄을 힘들게 당기고 있는가? 왜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만날 수 없는 텅 빈 공간을 저리 외로이 채우고 있는가? 왜 안절부절못하고 기다림의 나무통을 그리 세차게 돌리고 있는가? 거기엔 오직 그만 있었다. 다른 아무도 없었다. 어제도, 그제도, 그 전날도, 또 그 전날도. 어두움과 추위 그리고 한 그루 나무. 단순하고 조촐하고 비극만 튀어나올 듯한 배경. 그 무대 위에 그는 혼자 있었다. 그리고 긴긴 시간이 흐르고 별빛마저 잠드는 깊은 시간이 되면, 그는 큰 신발을 바닥에 터덕거리며 거기를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어제처럼, 또다시 거기에 있었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는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는 무엇을 그렇게 열망하는가? 그 사람을 꼭 만나야 하는 것인가? 오늘 온다고 약속해놓고, 어제 온다고 약속해 놓고 번번이 약속 어기는 그 사람, 그는 그래도 만나야만 하는가? 어둠 속에서 힘든 시간을 세어가며 서성이며 두리번거리며 그를 꼭 찾아야 하는가? 그 비극과 같은 공간 속에서도 그를 기다려야 하나? 그래. 그는 그 사람을 꼭 만나야 했다. 모든 걸 다 걸어서라도 만나야 한다. 거기에 오늘도 내일도 그가 나오지 않더라도 만나야 한다. 그를 반드시 만나고 말 것이리라.
그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그는 어쩌면 응얼어진 마음을 치유해줄 전능의 손 일지 모르겠다. 내면 깊이 가라앉은 슬픔의 찌꺼기를 한숨에 쓸어 버릴 구원수 일지 모른다. 그는 어쩌면 에덴의 원초적 기쁨을 퍼 올려줄 두레박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는 그가 알지 못하는 소망 일지도 모른다. 황금 빗살이 뿌려지고, 빛과 어둠이 자리를 바꾸는 저녁이 어스 레이 찾아들면, 그는 또다시 그 무대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를 기다린다. 그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희망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