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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이화니 Aug 31. 2021

양파 주점

나는 울고 싶다

나는 울지 않는다. 괴롭고 어렵고 비참해도 눈물은 없다. 검붉은 피멍이 내장을 에워싸도, 가슴 조여 비명이 터져 나와도 끝까지 견딘다. 다만 조금 어색한 표정만 자아낼 뿐. 베어 나오는 아픔 숨기고 막아 내느라, 내 얼굴 피부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지만.

오늘 난 울고 싶었다. 자제되지 않은 험악한 표정. 성난 재채기처럼 쏟아 뱉어지는 말. 시뻘겉게 긴장된 악한 모습이 깊은 고랑 새기며 얼굴에서 나왔다. 거친 물방울 파편이 입술을 튀겨 나가서 큰 파동 일으킨다. 속이 막힌 듯 답답하다. 큰 돌덩이 앉은 듯 무겁다. 난 눈물 흘리지 않았다. 분명 내 얼굴 피부는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동물 가죽이다. 속에서 흐르는 거친 슬픔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엷게 비치며 보이지도 않는다. 가늘게 비집고 새어 나오지도 않았다. 다만 꽉 막힌 돌부리 사이 그 속을 답답하게 흐르고 있다.


양철북 양파 주점에 가고 싶다. 슬픔 있어도 눈물 만들 수 없는 여기와 다른 거기. 목놓아 통곡하며 거친 물줄기를 쏟아 낼 수 있는 곳. 두꺼운 얼굴 가죽 베어내고 속을 투명하게 비출수 있는 그곳. 그래 거기는 답답하게 남은 불결한 찌꺼기, 숙변이 없다. 거기엔  찬 공기 불고  생명의 희망이 싹튼다. 난 거기서 돼지 모양 나무 도마와 식칼을 주문할 것이다. 큼직한 못 생긴 양파 두 개도 산다. 그리고 식칼로 힘차게 그 양파를 베어 낼 것이다. 아름다운 자단 색 양파 껍질이 서슴없이 벗겨지며 떨어져 나간다. 연한 녹색 줄무늬가 있는 투명한 양파 속살이 식칼 아래로 잘리어 나간다. 그리고 양파를 잘게 잘게 쪼갤 것이다. 양파 조각을 두 손으로 힘 있게 으깰 것이다.

눈도 못 떴다. 눈물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재채기가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콧물과 눈물, 뒤범벅이다. 매운 양파 바람이 불었다. 손에 으깨어진 양파를 가득 쥐고서 찡그리며 시끈 시끈 한 코 붙잡고 통곡하였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속에서 썩어가는 물줄기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삼투압이 작용하는 모세관 현상처럼, 지하수가 양수기를 통해 지표 밖으로 펑펑 쏟아지며 흘렀다. 막힌 속이 시원하게 뚫렸다. 뒤집어 놓은 외투처럼, 속이 훤히 보인다. 맑은 시내가 가슴을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다. 새가 지저귀고, 투명한 저음 관악기 트럼본 소리가 들려온다.

오스카는 양철북을 잡았다. 기분대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성장이 멈춘 세 살 이후로 100개 이상 양철북을 새로 구입했지만 이렇게 신나게 두드린 적 없다. 악보와 메로디도 없다. 그냥 삶을 치고 있다. 영원한 세 살짜리 고수인 오스카를, 소리도 눈물도 북도 없는 꼽추 오스카를.


그때 난 외할머니 손 잡고 논두렁을 거닐고 있었다. 금강공원 파라솔 엄마 가게에서 시큼한 생강과자 먹고 있었다. 동생과 손잡고 동래 미나리 밭 평원을 지나고 있었다. 구세군 제복 같은 교복 입은 중1이 되어 있었다. 가슴이 뛰고 있었다. 오스카의 북소리가 지나간 내 삶을 끄집어낸 것이다. 깊이 숨겨진 회한과 아픔도 건드렸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행복이 북소리 장단 위에 있었다. 거기엔 세상에서 이기고 싶어 애쓰던 노력과 안타까움도 있었다. 서울 봉천동 어두운 1층 전셋집도. 엄마 부르는 소리 따라 이방에서 저 방으로 부엌 기어가는 세 달 배기 우리 아이도. 심하게 아파하고 좌절했던 아이의 모습도 있다. 대구 원룸에서 땀 흐리며 요리하는 아내의 모습도. 그리고 큰딸 기분대로 야단치고 축 뻗어버린 가련한 내 모습도.

이제 거칠게 흐르는 눈물도 그쳤다. 나는 양파 주점을 나왔다. 어두운 지하 계단을 올랐다. 밝은 햇살이 눈을 부셨다. 눈과 코로 흘렀던 눈물 자국은 말라가고 있었다. 태양 빛 조각들이 그 짙은 자국 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보석처럼 반짝거리며 거기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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