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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이화니 Sep 01. 2021

100일의 행복

뜨거운 여름이 여전히 극성이다. 일본 열도로 지나는 태풍이 온다고도 하고, 간밤에 비도 제법 내렸다. 오늘 아침에는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왔지만, 더위 기세는 아직도 여전하다. 하늘의 불덩이가 한반도 상공에 다가서서 머물러 있으니 온 땅 떵이가 온열병에 걸려 버렸다. 습기 머금은 뜨거운 기운 때문에 우리 몸은 땀 뱉어내며 체온 조절하느라 힘들어하는데, 푸른 하늘엔 새 하얀 뭉개 구름이 피어나고 있다. 구름과 하늘이 빚어내는 파노라마 속으로 빛이 스며들어 황홀하다. 퇴근길 그린홀 너머, 구름 사이를 뚫고 쏟아지는 빛줄기를 바라보며 한참 머물러 서 있었다. 대지는 이글 거리지만 태양과 구름과 하늘이 만드는 공간 작품은 신기하고 놀랍다.


오늘 아침 아파트 헬스장에서 운동할 때, 눈앞으로 펼쳐진 바다와 하늘 너무 좋았다. 푸른 바다 위에 펼쳐진 구름들의 군무, 구름 그림자가 스며들며 만드는 바다 색체. 하늘과 바다에 누가 이렇게 예쁜 그림을 그려 낼 수 있을까? 오늘 아침 난 선물까지 받았다. 구름에 봉우리를 가린 큰 섬이 갑자기 수평선에 나타났다. 마치 눈 덮인 후지산이 갑자기 바다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부드러운 경사는 수평선 위에 머물다가 좌우로 길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육지를 내려놓았다. 이렇게 선명한 대마도를 본 적이 없다. 푸른 바다 위 짙은 구름 덕인지, 멀리 떨어져 있는 큰 섬이 선명히 다가왔다. 아니 멀리 있는 육지가 아니다. 저기 이기대 너머 오륙도에서 또 오륙도까지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하늘과 구름과 날씨가 만드는 빛의 굴절이 저 멀리 존재하는 피사체를 해운대 앞바다로 불러들였다. 마치 세상의 온갖 소식과 소문을 커다란 보청기를 끼고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 까지 데리고 왔다. 종이 확성기에 대고 크게 소리치면 들릴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이 땅바닥은 지글거리는 더위로 힘들어 하지만, 하늘과 바다는 푸름과 하양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배롱나무 백일홍이 피었다. 여기저기가 붉은 꽃으로 환하다. 7월 말에 슬금슬금 피어나더니, 이제 출근하며 몇 발자국만 걸어도 내 시선과 만난다. 오늘 식사하러 가면서 백일홍 가로수를 만났다. 뜨거운 계절에 피는 붉은 꽃. 일 년 내내 기다리다 중복이 되어서야 나타나는 여름꽃이다. 힘든 더위를 몸에 물고 피어나서 태풍을 만나고 여름 비바람도 만나고, 100일 동안 세상을 붉게 밝힌다. 그리고 가을 냉기가 세상을 덮는 계절에 우리를 떠난다. 나는 백일홍이 좋다. 오래 함께 있어서 좋다. 힘들어 헐덕거리는 계절에 피어나서 좋다. 작은 머루 같은 약한 꽃들이 피었다가 지고 그 옆에 작은 봉오리들이 다시 꽃을 피우고, 백일을 그렇게 피고 진다. 작은 것들이 뿜어내는 큰 생명이 좋다. 언젠가 백일홍 시를 읽고 크게 감동한 적이 있다. 그 시를 다시 만나고 싶어 인터넷 세상을 이틀 동안 훑어 다녔다. 그런데 찾을 수가 없다. 도종환 시, 다른 사람의 시는 여기저기서 보이는데 그 시는 없다. 아마 무명작가의 시였든가? 너무 아쉽다. 다시 그 시를 만나고 싶다. 기억하고 싶은 시를 찾아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는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가? 찾지 못한 아쉬움도 많지만, 그래도 좋다. 앞으로 있을 더 많은 여름에 그녀를 만날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 숨은 백일홍을 찾을 것이다. 아니 못 찾아도 좋다. 뜨거운 여름에 반갑게 그녀를 만나고 새롭게 느끼고 반기리라.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배롱나무 백일홍 여행을 떠나고 싶다. 밀양 표충사, 강진 백련암, 안동 병산서원, 장흥 백일홍 군락지. 차가운 겨울이 찾아들기 전에 100일의 진홍빛 행복을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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