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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이화니 May 31. 2022

English Patient를 읽고

좋은 주말을 보냈다. 아내와 뙤약볕을 받아가며 수영강을 지나 온천천 근처 악속 장소까지 걸었다. 얼굴과 팔 피부가 벌겋게 일어났지만, 행복한 만 구천보 걸음이었다. 그동안 오래도록 읽고 있는 영어 소설 English Patient를 마쳤다. 어렵고 힘들었다. 줄거리를 놓치기고 했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적이 많다. 그러나 때때로 찾아드는 감동으로 즐거워했다. 시로 쓰인 소설의 묘미를 경험했다. 본문엔 길고 자세한 설명이 없다. 시적 감수성을 흠뻑 담은 단문으로 내용은 이어진다. 문장의 배열이 문법적이지 않다. 대화하듯이 내용이 툭 던져진다. 적은 단어로 표현된 신선한 터치. 향기가 피어 나왔다. 알 듯 모르는 신비가 스며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이 생각났다. 물론 그런 마법과 같은 환상은 전혀 아니지만, 여기 이곳은 가 보지 못한 상상의 공간이었다. 분명 좋은 책이 주는 즐거움을 뿌리고 있었다. 그 세상에 들어서니 잔잔하고 투박한 단어들이 물결처럼 흐른다. 군더더기는 없다. 그것들은 내 머리와 마음속으로 들어가더니 공간을 이루고 상황을 만들어 낸다. 소설의 그녀가 서서 바라보는 곳을 나도 바라본다. 그녀에게 다가와 속삭이는 바람을 나도 느낀다. 그녀가 머물고 있는 공간에 나는 서성 거린다. 스토리는 내 속에서 다시 창조된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내 자유다. 바로 내가 스토리를 만든다. 내용과 뜻이 잘 이해되지 않아도 좋다. 신비의 안개가 절경을 가려도 좋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좋다. 내 마음이 그것을 만들어 내니까. 책은 많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생각과 주변만 만들고 던지면 된다. 다 말해지지 않은 스토리는 우리에게 슬며시 다가와서 다른 나만의 세계를 만든다. 나는 그곳에 머물며 느끼고 즐거워한다. English Patient는 많이 말하지 않았다. 조용히 내게 다가와 마음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그리고 내 속에서 가장 오래 머물며 그의 세상을 더 크게 만들어 갔다. 시로 만든 소설이 준 즐거움을 느끼며 행복했다.


English Patient 영화를 보았다. 책 속에서 유영하던 스토리들이 영상으로 들어왔다. 전장의 세계가 펼쳐졌다. 심각한 화상으로 죽어가는 남자를 간호하는 Hana의 모습이 나타났다. 삐꺽 거리는 계단을 올라가니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누운 침대가 보인다. 무대는 사막으로 바꾸어졌다. 모래 바람이 몰아치는 그곳에 캐서린과 알마시가 있다. Cave of swimmers. 물속에서 수영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그려진 동굴 속에서 그들은 사랑을 한다. 그 동굴  속에서 사랑의 편지를 쓰며 캐서린은 죽어간다. 헤로도토스도 나오고 안나카라레나도 스치고 지나갔다. Hana가 사랑한 시크교도 Singh도 화면에 등장했다. 엄청나게 큰 불발탄 신지뢰를  해체하느라 온 몸은 진흙뻘 속에 빠져 있고 영혼까지 뺏기고 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 오토바이 타고 떠난다. 책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의 이야기는 영화에서 없다. 그래도 원작을 잘 그려 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영상 처리가 좋다.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장면도 있지만, 구성이 좋다. 그래서  좋은 평가에 아카데미 상도 많이 받은 듯하다. 그러나 영화에는 빠진 것이 많다. 책에서 서술하고 내 머리에서 만들어 낸 신비가 사라져 버렸다. 내가 상상하던 모습과 영화의 인물은 너무 다르다. Hana와 카라바지오, 그리고 시크교도가 지내던 수녀원(San Girolamo)의 모습도 달랐다. 헤로도토스 역사를 읽어 주며 정신을 교감하던 잉글리시 페이션트 침실도 상상 속의 그곳이 아니다. 어렴풋하며 희미해서 더 좋았던 그곳이 선명한 영상으로 나타나니 당황스럽다. 책들 속에서 만난 사람, 장소, 사건이 너무도 다르다. 신비가 사라져 버렸다.


오늘도 하루가 지났다. 날씨가 무척 덥다. 아침저녁 공기는 아직 시원 한데 햇빛은 한 여름이다. 수업하고 피곤해 접이 의자에 누웠다. 나도 모르게 눈이 붙었다. 선거 공휴일을 앞둔 편안한 오후다. 이미 주말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킨들을 펼쳤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다시 읽기로 했다. 그냥 흘려보내기 싫다. 문장 속에 숨어있는 언어의 즐거움을 다시 느끼고 싶다. 1장 The Villa를 읽어 내려가고 있다. 언제 읽어 봤느냐며 글귀들은 새로운 인사를 건넨다. 분명 내 눈이 보고 마음까지 가담했던 페이지가 새로운 느낌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다. 물 흐르듯 스토리는 나를 다시 점유해 버렸다. 처음 만남과 두 번째 만남의 느낌이 섞이며 나를 책 속으로 달리게 한다. 향기 가득한 스토리로 나를 끌어들인다.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She entered the story knowing she would emerge from it feeling she had been immersed in the lives of others, ~~~~~~~ her body full of sentences and moments, as if awaking from sleep with a heaviness caused by unremembered dreams.


그녀는 스토리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른 사람의 삶에 푹 담겨 버린 느낌이다. 그녀의 몸은 이미 문장으로 푹 젖어들어 있다. 그녀는 소설의 순간과 찰나에 빠져 버렸다. 기억나지 않는 꿈으로 무거웠던 잠결 속에서 그녀는 깨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인생이 무미하다고 한다. 건조하다고 한다. 마음은 물기가 없어 바짝 말라 버렸다. 쩍쩍 갈라진 논드렁 황토 빛 흙덩이처럼. 아니다. 그런 거 아니다. 책 속으로 들어가면 삶에 물이 흐른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생기를 맛볼 수 있다. 좋은 느낌이 다시 살아난다.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여유가 있고 활력이 솟는다. 희망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음이 감동이라는 물결을 타며 부풀어 간다. 즐거움으로 세상을 긍정하게 된다. 그래서 기도가 나온다. 그래서 사랑하게 된다. 나는 오늘도 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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