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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Mar 02. 2023

속닥속닥 귀띔해 주기

내가 나에게

꽉 채운 두 달 동안의 방학을 끝내고 드디어 학교에 갔다. 초등학교 최고참 학년이 된 딸아이.

전날 떨리는 마음으로 친한 친구들과 반배정 결과를 물으며 시무룩해하다가도, 제법 가까운 친구 한 명과 같은 반이 되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얼마나 소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던지.


6학년이 된 딸아이의 모습을 보니 그 시절 내가 생각났다.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초등학교(사실 국민학교) 때 이사를 자주 다녔다. 전학도 세 번을 했으니 학교는 네 군데를 다닌 셈.

그때나 지금이나 쓸데없이 수줍음이 많고 낯을 가리는 성격으로 학교를 옮길 때마다 커다란 교탁 앞에 서서 친구들에게 내 소개를 하는 것이 딱 죽을 맛이었다. 그래봐야 어디서 온 누구누구 이름 석 자 말하는 것뿐인데도 목소리에 창피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6학년 마지막으로 전학 간 학교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는 조금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해 전학은 다른 해와 달랐으므로. 13년 인생 처음으로 엄마 없는 아이가 되어 학교에 간 날이다. 엄마가 죽은 것은 아니니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다만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어 당분간은 그냥 없다고 생각해야 했다. 엄마 아빠 다 큰 어른의 인생이니 어린 내가 감히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학 첫날, 집에서 작성해 오라며 선생님이 종이 한 장을 주셨다. 아마도 가정환경조사서였던 것 같다. 그때는 엄마, 아빠 인적사항, 직업, 집에 텔레비전이 있는지, 자가용은 있는지 그런 시답지 않은 것들을 조사하던 시대였다. 쓸데없이 수줍음이 많은 것 못지않게 더 쓸데없이 순진하고 솔직했던 나는 없는 엄마를 있는 것처럼 쓰는 것이 어쩐지 망설여졌다. 숨겨서 적어낸들 다 알고 있을 것만 같은 불안함, 왜 거짓말했냐고 다그칠 것 같은 두려움, 부주의한 선생님이 친구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엄마 얘기를 물을 것만 같아 조마조마한 마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선생님께 장문의 편지를 썼다. 구구절절 다 생각나진 않지만 "선생님 죄송한데 제가 사실은 엄마가 없어요.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요" 뭐 이런 내용이었다. 왜 죄송한 마음이 들었을까?


20대 중반 미혼이셨던 여자 선생님은 우리 집과 꽤 가까운 주택 옥탑방에 살고 계셨다. 도둑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가 문 앞에 꼼꼼히 편지를 두고 내려왔다. 심장이 쪼그라들고 자꾸 두리번거렸다. 죄를 짓는 기분이랄까? 왜 엄마가 없는 게 죄송하고 죄를 짓는 것 같지?


그 뒤로도 그런 거지 같은 기분은 꽤 오래 파고들었다.

소풍날, 운동회날, 졸업식날, 반장선거날, 친구가 집에 놀러 온 날.. 더 깊이.

엄마가 없는 학교생활은 슬프다기보다 왠지 부끄러웠고, 큰 잘못을 한 것 마냥 자꾸 움츠러들게 했다.






아빠가 나를 데리고 자주 가던 순대집이 있었다. 아빠는 순대 한 접시를 시켜놓고 손잡이가 달린 물컵에 소주를 가득 부어 마시곤 했다. 소주 한 병 때로는 두병을 다 비울 때까지 나는 태연하게 앉아 순대만 먹었다. 동네 조그만 가게라 오다가다 아는 사람들이 가끔 있었는데 누구는 내게 어른스럽다 칭찬했고, 누구는 내게 애 같지 않게 어른스럽게 군다 타박했다.

어쩔 수 없이 눈치가 늘어 눈치를 보는 게 어른스러운 거라면 그때 난 제법 어른스러웠던 것 같다.


순대집 사장님은 아빠에게 시시껄렁한 농담도 잘 건넸다. 뽀글뽀글 파마머리의 못생긴 그 아줌마가 그냥 아빠랑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나 내 엄마가 되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엄마가 없다는 건 조금 불편하고, 대체로 외롭고, 많이 서러운 일이었으니까.





사람들은 지금보다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오늘이,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살림이 여의치 않던 신혼시절, 자주 막막한 기분으로 한숨짓던 나에게 “너무 걱정 마. 앞으로는 계속 좋아져.”라고 귀띔해주고 싶다. 해결도 안 되는 근심으로 잠 못 이루던 나에게 걱정은 줄이고 좀 더 재미있게 하루를 보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진짜 그러고 싶다.

이유미 <편애하는 문장들> 중에서



나도 귀띔해주고 싶다. 지금 딸과 같은 나이인 어린 나에게.


"새날아, 앞으로 계속 좋아져. 엄마도 다시 만나게 돼. 그러니 눈치 보느라 열세 살 때만 느낄 수 있는 찰나의 행복을 놓치지 마. 진짜 그랬으면 좋겠어."


어쩐지 미래의 내가 지금 나에게 해주는 귀띔 같기도 하다.


“새날 여사님. 나이 들수록 점점 좋아져요. 40대 별거 아니에요. 나이와 미래에 대한 걱정은 줄이고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로 하루의 시간을 가득 채워봐요. 다시 오지 않을 40대를 더 재미있고 건강하게 보내라고요” 

속닥속닥. 수군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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