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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Mar 13. 2023

연필이 문제가 아닙디다.

마음 들여다보기

"연필 연필 연필!"



기어코 소리를 질렀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나문희 배우가 “호박고구마 호박고구마 호박고구마!”라고 악쓰는 장면과 흡사한 꼴이다. 6학년 딸아이에게 느닷없이 연필을 부르짖는 엄마.




작년부터 아이는 부드럽고 날렵한 샤프의 매력에 빠졌다. 샤프를 사용하면서 연필은 최선을 다해 쓰지 않는 중. 흐리멍덩 힘없이 날아다니는 글씨를 보며, 엄마 때는 중학교나 가야 샤프 구경했는데 어쩌고 저쩌고, 샤프심이 자꾸 부러져서 오히려 쓰기 불편할 텐데 이러쿵저러쿵, 힘을 좀 줘야 글씨가 예쁘게 써지던데 이러니 저러니 라떼를 퍼부었더랬다. 허나 염려도 잠시. 아이 글씨체는 작아졌다 촘촘해졌다, 날아다니다 변화를 반복하더니 이내 가지런히 정돈되었다.




6학년 새 학기가 되어 받아 온 안내장을 살펴봤다. 다정함과 심심함이 적당히 묻어있는 인사말과 새 학기 준비물, 당부사항이 담겨있다. 초등엄마 6년 차. 별거 있겠나 싶어 대충 훑고 치우려는데, 준비물 중 연필이란 단어의 노란색 강조표시가 유독 눈에 띈다. 바른 필기습관을 위해 가급적 샤프 사용을 하지 않도록 한다는 설명도.


알아서 준비물을 잘 챙겨 온 딸인지라 평소에는 확인도 안 하던 내가 이번에는 자꾸 뾰족한 눈을 한채 아이의 필통을 쫒고 있다. 이상하게도 연필에 꽂혔다.


 "연필 챙겼어?" "선생님이 연필 가져오라고 하시던데?" "잘 보이라고 노란색으로 색칠도 해놓으셨던데 못 봤어? “ 점점 노란색 강조표시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집요하다 싶다.


아이는 엄마 등쌀에 연필을 찾는 척 하지만 표정은 무심하고 입은 계속 구시렁 거린다. 마음에 드는 연필이 없다, 연필깎이도 고장난지 오래다, 결정적으로 도대체 왜 샤프를 쓰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느닷없이 나문희 배우가 된 것이다. 선생님이 바뀌셨으면 새로운 선생님에게 맞춰야 한다는, 어쩐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애매한 말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어릴 적 새 학기가 되면 교문을 들어설 때부터 긴장하기 시작했던 나다. 유난히 더 똑바로 앉아 숨도 조그맣게 쉬면서 눈동자는 끊임없이 선생님과 친구들을 따랐다. 주위를 살피는 건지 눈치를 보는 건지. 혹여나 나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생길까 봐 학기 초가 되면 바짝 신경이 쓰였다.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은 게 아니라 밉보이기 싫었다. 나에겐 이미 결손가정이라는 색안경이 한 겹 씌워져 있다 생각했기에 배로 애썼다.

지금 생각해도 불쾌한 단어 결손가정. 도대체 공부도 잘하고 착실한 내가 무엇이 결손 되었다는 것인지. 애꿎은 마음이 불쑥불쑥 치밀었지만 마음을 숨기고 항상 말 잘 듣는 아이,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 착해 보이는 아이로 지냈다. 그때는 그랬다.




아이 등교 후 딸에게 소리까지 지른 감정을 곱씹어 봤다. 연필이 문제가 아니더라. 연필을 가져가지 않은 아이와 챙겨주지 않은 엄마를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뭐라고 판단하실까, 새 학기부터 책잡히면 어쩌나 하는 내 감정이 문제였다. 친구들은 안 가져왔는데 우리 아이는 챙겨가 칭찬받았으면 하는 알량한 마음도 더해졌다.


알 수 없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를 지나치게 신경 쓰다 에너지가 소진되는 일이 많았고, 정신적 피로함에 널브러진 날도 무수했으면서 아이에게는 새로운 선생님에게 다 맞춰야 한다는 억지 논리를 쏟아냈다. 그깟 연필이 뭐라고. 무조건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예의 바르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원했으면서도 말이다. 스스로 겪고 판단해도 될 일을 지레 먼저 ‘나는 선생님이 노란색으로 강조하신 연필을 잊지 않고 챙기는 말 잘 듣는 엄마입니다'를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어릴 적 나처럼.



알아차렸으니 생각을 바꿔보자.


1. 세모눈 하지 않고 아이가 알아서 하게 둔다.

2. 연필을 사용해야 하는 당위성은 선생님께서 잘 설명해 주시리라 믿는다.

3. 연필을 준비하지 않아 지적을 당할 경우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도록 기다려준다.

4. 6살이 아닌 6학년임을 명심하자.



아이들의 행동에 반사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왜 발끈하는지 자문해 보자. 그렇게 스스로 질문을 하다 보면 알아차림이 일어나는 공간이 생긴다.

셰팔리 차바리 <깨어있는 부모> 중에서



“연필이 문제가 아닙디다.

책 읽으며 마음공부 좀 더 해야겠수다. 허허“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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