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긴 글 #55 - 대장 고양이에게 찍혔다

하루 종일 고양이 생각만 해

by 생강

55.


기가 센 고양이를 만났다.


아침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 좁은 골목 옆에 틈새가 큰 울타리가 있었다. 너머엔 주차 공간이 보였고 차가 한 대도 없어서 공허한 바람이 불었다. 그때, 누가 봐도 대장처럼 보이는 고양이가 안 쪽에서 슬금슬금 걸어 나왔다. 검고 하얀 고양이. 얼굴엔 이제껏 살아온 묘생이 묻어있었고 걸음걸이는 느리고 당당했다. 당황스러웠다. 아주 느리지만 시선은 내게 꽂은 채 걸어오는 고양이가 마치 숙제 검사를 하러 오는 선생님처럼 느껴졌다. 뭘 해야 하지. 내가 가진 건 연어 냄새가 나는 고양이 간식뿐인데. 고양이를 만나면 저번처럼 길바닥에 간식을 주지 말고 그릇에 넣어서 주기로 스스로와 약속하고 휴대용 접이식 그릇을 들고 다니긴 하는데. 간식을 줘도 되나? 도망가지 않을까? 저 아이는 눈빛 하나로 사람의 기를 누르는 아주 강력한 고양이구나. 왠지 내가 진 거 같은데. 나는 우두커니 서서 안 주머니에 담긴 간식을 슬그머니 꺼냈다. 초록색 휴대용 접이식 그릇의 주름을 피고 간식을 담으려는 순간, 고양이는 담벼락 사이로 천천히 몸을 숨겼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아주 특별한 고양이를 만났어.


집으로 돌아와 간식과 그릇을 정리하며 고양이에 대해 생각했다. 이 동네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큰 얼굴의 고양이었다. 날이 따뜻해지고 고양이가 종종 나타나는데, 몇 번 마주친 아이들도 있고 새로운 아기 고양이들도 있었다. 그 아이는 어디서 온 걸까. 밥은 먹었을까. 물은 마셨을까. 얼굴이 많이 상했던데 어젯밤이 고됐을까. 간식을 더 빨리 꺼내서 아이에게 주지 못한 것을 내내 후회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내 배가 채워지는 것과 고양이의 식사를 계속 생각했다.


아침과 점심은 따뜻했다. 오후가 되고 해가 지면, 아무리 4월이어도 추웠다. 음력으로 아직 3월이야. 엄마는 말했다. 사람도 추운 날씨다. 고양이는 맨 몸으로 길 위를 버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길 고양이가 아니어서 집에 사는 사람이어서 따뜻한 물을 마실 수 있고 사람이어서 길 고양이의 굶주림을 깊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쿡 쿡 찔렀다. 그 아이는 얼굴에 ‘대장’이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날 피하지 않고 도리어 내 쪽으로 차분하게 돌진했다. 고양이를 보고 귀여워서 어쩔 줄 몰랐던 적은 있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당황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가 눌렸네.

밥그릇을 싹싹 긁어 마지막 한 숟갈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대장 고양이에게 찍힌 거 같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는 외모와 말투와 행동에서 느껴진다. 저 사람은 아주 강한 사람이구나. 꽤 단단한 생각을 하네. 잠깐만, 나 지금 저 사람이랑 되지도 않는 기싸움 중인가. 내가 질 게 눈에 훤한 걸. 그럴 때면 나는 그저 내가 되려고 노력한다. 어색하게 말하지 말고 나의 생각을 하나씩 하나씩 차분하게 전달하자. 나는 내 의견을 잘 전달하면 된 거다. 이미 지고 있으니 의견을 말하는 것에 의의를 두자. 말투가 꼭 싸우자는 것 같네. 나는 싸울 생각이 없다. 싸우는 건 피곤하고 머리 아픈 일이므로 일단 나는 말만 하자. 그 뒤로는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 흘려보내자. 저 사람과 나 사이의 묘한 기류를 끊어내고 싶다. 그런 생각만 하면서. 그만큼 나는 기싸움이라는 아주 고요하고 피 튀기는 일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말없이 상대방을 납작하게 누르려다가 온갖 체력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되는 대로 살자. 뭐 하러 싸우고 그래. 싸움도 양 쪽에 불이 붙어야 싸움이지. 한쪽은 열 내고 다른 한쪽은 가만히 있으면 싸움이 아니라 한쪽만 바보가 되는 게임이 돼. 나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종종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마. 오늘을 사는 데도 힘이 드는데 이상하게 나만 보면 화내는 사람에게 쓸 힘이 어디 있어. 아까워, 아까워.


대장 고양이와 나는 무엇이었을까. 사람과 사람의 사건은 아니었다. 동물과 사람 사이의 기는 사람의 경험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고양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눈은 나를 옭아맸다. 피할 수 없었다. 얼굴에 묻은 삶의 흔적 때문일까. 아니면 꼬질꼬질한 몸통이 느리고 정확하게 날 향해서였을까. 저 인간 혹시 간식이 있나, 하는 고양이 특유의 몸짓이나 얼굴과는 달라서였을까. 너는 너 갈 길을 가고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우린 그저 잠시 마주친 것뿐이고 언제 다시 만날지 아무도 몰라. 기다리지 마. 그런 눈빛이어서 나는 망설였을까. 고양이와 나 사이의 기류는 고양이의 생존에서 기인한 두터운 방어막이었을까. 저녁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대장 고양이의 얼굴과 굵은 다리의 움직임을 생각했다. 간식을 못 준 것을 후회하는 게 아니라 그 너머의 생존, 큰 얼굴과 큰 몸으로 길 위를 견디는 고양이의 삶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을 사는 데도 힘이 들었으나 이상하게 고양이를 생각하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진작에 끝낸 이야기. 나는 재회를 바라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지.


고양이의 눈빛은 ‘기다리지 마.’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바깥으로 나가 그 골목을 쭉 살펴보았다. 해가 지면 바람이 차서 낮과 다른 시간이 시작되는데 이 동네엔 간식과 밥을 주는 사람은 있어도 길 고양이 쉼터는 없다. 간식을 주다 보면 물을 챙기게 되고 물을 주다 보면 바람을 막아 줄 쉼터를 생각하게 되고 지금은 봄이지만 장마와 폭설을 생각하게 된다. 대장 고양이에게 제대로 찍혀서 하루 종일 고양이만 생각하고 있다. 고양이의 기는 다수의 고양이를 떠올리게 했고 나는 사람이어서 자꾸만 미안해졌다.

다시 보고 싶어.

따뜻한 물과 간식을 들고 널 마주치고 싶어.

그땐 바보처럼 서 있지 않을게.


어쩌면 고양이는 사람보다 기가 센 동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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