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지면을 통해서 만나는 사이지만, 벌써 아홉 번의 만남이 이어져왔으니 우린 글벗 또는 마음벗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나이 들수록 '벗'이란 말이 제 입에 잘 붙기도 하고요.
벗이란 단어가 나온 김에 막 쓰기 한 번 해볼까요?
제시어는 '벗에게'.
일단, '벗에게'라고 씁니다. 그리고 누군가 한 존재를 떠올려 보세요.
보고 싶은 친구, 잊고 살았던 오래전 동무, 요즘 자주 만나는 이웃, 든든한 동지이자 벗, 어쩌다 툭 왕래가 끊긴 옛 친구,... 혹은 이런 사람이 내 벗이면 좋겠다 싶은 미지의 누군가도 좋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사람한테만 집중해 보세요. 평소 좋아하던 그의 미소, 표정, 행동을 기억해 내면서요.
그의 이미지가 분명해졌다면, 그의 이름을 적어보세요. 이름 뒤에는 하고픈 말은 무엇이든 연결시켜 갑니다.
그냥 안부를 물어봐도 좋고요. 고맙거나 미안한 게 있으면 그대로, 궁금하거나 화나거나 따지고 싶거나, 떠오르는 그대로 쓰는 거예요. 편지라고 하면 좀 부담스럽고요, 짧은 엽서 한 장이다 생각해 보세요. 우체통에 넣을 엽서가 아니니까 잘 쓰려고 애쓸 필요는 1도 없는 거, 아시죠?
엊그제 누군가로부터 들은 질문들입니다. 외국에서 십사 년 정도 살았다고 밝히면 으레 듣게 되는 질문이죠.
이십 대 후반에 미국의 달라스에서 잠시, 서른 살 초반부턴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서 한참을 살았습니다. 두 곳 모두 제가 어른이 된 후에 살게 된 곳이니, 일상 중 맞닥뜨린 불편함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었겠죠?
가장 적응이 안 되는 부분은 사회 제반시설이나 제도상의 속도였답니다.
집에 뭔가 고장 나서 수리를 요청할 때도 관공서에 가서 서류 하나 제출할 때도, 뭐 하나 단번에 되는 게 없었거든요. 기다려라, 다음에 다시 와라는 말이 반복되더군요. 그 사회에선 이상할 것 없는 속도지만, 무엇이든 '빨리빨리', '착착' 진행되는 나라에서 자라난 저로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었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그 속도에 어느 정도 길들여졌지만, 그럴수록 한국의 빠른 속도감이 그리워졌습니다.
물론 예전에는 '빨리빨리' 식의 우리네 특성을 싫어했었지요. 정부 주도의 급격한 경제성장이 낳은 폐단으로만 치부했으니까요. 타향살이 수년만에 '빨리빨리'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답니다. 사회의 공적 시스템이 빠르게 움직여주는 것이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편리하고 유용한지, 떠나 보니 알겠더라고요. 아무튼 그런 불편함 들은 고향을 향한 진한 그리움을 부채질해 주었지요.
헌데 그보다 훨씬 강력한 향수병 유발자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공! 중! 목! 욕! 탕!
널찍한 온탕과 강렬한 열탕, 뼛속까지 시원한 냉탕과 몸속 노폐물을 쫘악 빼줄 것만 같은 사우나까지, 그 모든 시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것도 은혜로운데, 가끔은 낯선 언니들과도 편안히 수다를 떨 수 있고, 더 가끔은 세신사의 손맛에 황홀한 휴식도 즐길 수 있는 동네목욕탕 말입니다.
그게... 그렇게 그리웠었네요.
특히 멕시코시티의 건기 시즌에는 극도로 건조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목이 늘 답답해지거든요. 그럴 때면 '아! 동네목욕탕 한 번만 가보고 싶다!'가 절로 나옵니다. 정말 그리워 했죠. 그런 그리움에도 끌어당김의 법칙이 적용되었는진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날마다 동네목욕탕으로 출근부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답니다.
벗님은 '동네목욕탕?'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어떤 장면이 기억나세요? 그 순간을 한 장의 사진 혹은 요즘 말로 '동영상 짤'처럼 표현해 보세요. 그 순간을 글로써 제게 보여주시는 거죠.
막 써볼까요? 제시어는 '동네목욕탕에서'.
써 놓은 글을 소리 내어 읽어보세요. 천천히요, 또박또박요, 마치 유명 작가의 글을 읽듯이요.
눈으로만 읽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실 거예요. 꼭... 해보세요!
아! 하나만 확인하고 갈게요.
막 쓰기에서는요, 글의 형식 혹은 장르 불문으로 편하게 씁니다!
일반 문장으로 연결되는 산문이어도 좋고요, 특별한 단어나 표현들을 사용하는 시도 좋아요. 일기도 좋고 희곡도 좋습니다. 벗님이 실제로 겪지 않은 일이라도 좋지요. 상상해서 쓰는 이야기, 즉 단편소설 같은 글 말이에요. 이렇게 저렇게 자꾸 써보다 보면, 벗님하고 잘 맞는 장르를 찾게 될 겁니다.
제 얘기로 돌아올게요. 일전에 언급한 교통사고 이야기를 기억하시죠?
멕시코 생활 끄트머리에서 만난 사고로 몸의 절반 가량이 부러지고 터졌다가 재조립되었지요. 고국에 돌아온 직후, 그러니까 벌써 십여 년 전이네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24시간 통증에 시달리던 중이었습니다. 특별한 연구와 화사람을 살리는 데에 는데, '냉온욕'이 통증 완화에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조언을 듣고는 아침마다 동네목욕탕엘 찾아갔습니다. 당시의 한 장면을 담은 '시詩인 듯 시 아닌 시 같은' 글 하나 옮겨올게요..
동네 목욕탕에서
하얀 온기 사이로 물소리 사람소리 몽롱한데
열탕에 절반쯤 몸 담그고 느릿한 호흡 누린다
배 한복판에 그거 수술 자국이에요?
목에 난 줄은 뭐예요?
아이구, 척추엔 또 무슨 일이래?
인생 선배님들 다스한 관심에
스르르 입 풀려 흉터에 얽힌 이야기들 꺼내놓는다
혀를 끌끌 차던 어르신 한 분 슬그머니
내 나이를 묻더니
마흔여덟? 아유, 괜찮다. 애기네, 애기!
바다만큼의 위로가
상처난 몸을 끌어안아준다.
___ [참 쉬운 시1:무명본색] 중에서
막 쓰기, 세 번째 들어갑니다.
시방 느낌 써보기!
세월이 흘러준 덕분에 지금은 많이 옅어졌지만 11년 전만 해도 제 몸은 눈에 확 띄는 수준이었습니다.
배 한복판을 세로로 가로지른 수술자국, 부러진 채로 의료시멘트에 의해 굳어져서 뾰족 솟은 요추 어디쯤, 부러졌다 붙은 뼈들 위로 울퉁불퉁한 피부, 종아리 뒤쪽에 뉴런 모양으로 찢어지고 접힌 흉터들. 무엇보다 몸의 좌우가 균형을 맞추지 못해서 열탕에서 냉탕을 오갈 때면 느릿하고 뒤뚱거리는 내 걸음새가... 누가 봐도 '아이고, 많이 아프겠네!' 싶었을 겁니다.
실제로는... 많이 정도가 아니라? 정말 죽을 것처럼 아팠죠, 하하하! 몸 보다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병들었기에 더 아팠던 시기입니다. 경력단절, 갑자기 마주한 중년, 경제적 어려움, 인간 관계도 끊고 스스로를 섬으로 고립시킨 우매함. 난생처음 자신감을 잃어버린 시기였으니까요. 아, 이야기는 따로 풀어놓으려 해요. 글 쓰러 오신 벗님한테 제가 너무... 하네요.
아무튼 당시 저는 어둡디 어두운 내면의 소리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까지 무능할 수 있지? 난 여태 뭘 하고 살아온 거야? 한심한 모지리 같으니라고...'
비관적 속삭임만 귀에 웅웅거렸습니다. 알고 보니, 그런 때일수록 귀 열고 눈 들어서, 내 바깥의 좋은 소리들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하더군요.
좋은 소리라 함은 어떤 소리를 일컫는 거죠?
제 생각에는요, 나를 살려주는 소리인 것 같습니다.
제가 목욕탕에서 들은 어르신의 한 말씀처럼요.
- 마흔여덟? 아유, 괜찮다. 애기네, 애기!
여든 살 어르신 눈에는 하염없이 부러운 청년, 아니 애기일 따름이었죠. 곧 털고 일어나 다시 걸어가면 되는 청년이요. 그만한 게 다행이니 울지 말고 잘 살라고 하신 어르신의 눈빛과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소리는 쓰러진 나를 안아주고 나아가 일으켜 세운 하늘의 소리였지요.
벗님은... 어떠세요? 벗님을 웃게 하는 말, 살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나요?
들리는 소리가 없다고요? 그럴 리가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가장 최근에 귀담아들은 좋은 소리를 기억해 보세요.
생각 안 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최근에 들은 말 중에서 벗님을 가장 힘나게 한 말이 있다면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