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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두둑 Sep 25. 2020

나는 호텔에 산다  

 서울 깍쟁이의 만만치 않은 강릉살이 기록

커튼 틈 사이로 수줍게 들어오는 붉은빛과 그림자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하얗고 바삭한 이불을 걷고 일어나 발코니 창문을 열자 잔잔한 파도 소리와 상쾌한 공기가 방을 채운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기지개를 펴자 소나무 숲 사이로 고개를 내민 태양도 붉은 빛을 힘차게 뻗으며 아침을 준비한다.



잔잔한 음악을 틀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작은 냉장고에서 사과 한 개를 꺼내먹고, 샤워를 하고 옷을 골라 입고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나가기 전, 문 앞 카드키를 뽑자 모든 불이 꺼졌다.


내 방은 4층. 두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2층 로비에 '관계자 출입금지'라고 적힌 문 센서에 지문을 찍고 들어간다. 방에서 사무실까지 50보가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매일 호텔에서 먹고 자고 출퇴근하는 호텔리어다.


시간을 거슬러 2년 전.

네모난 건물 안 사무실에서 바라본 창밖 하늘이 유난히 아름다워서 8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꼬박 1년을 쉬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 치열하고 싶어서.


분명히 서울의 중심인 용산구에 사는데 어쩐지 마음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점점 밀려나 서울 끝자락 벼랑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느낌이었다. 미세먼지, 혼잡한 소음, 지나친 경쟁과 깎아내림, 불필요한 관계와 의미 없는 비교에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피곤함의 탓을 '서울'이라는 삶의 터로 겨냥했던 것 같다. 서울에 계속 있으면 어제와 같은 오늘이 이어지고 오늘과 같은 내일이 올 게 너무 뻔했다. 그렇다고 딱히 지방에 연고도 없고 밥벌이를 할 직장도 없다는 생각에 서울을 떠날 용기도 없었다.


사업을 해볼까 다른 일을 배워볼까 고민하다가 간간히 프리랜서로 일도 하고, 해외 스타트업 회사에 취업했다가 출근도 전에 한국 지사가 없어지는 일도 겪었다. 여전히 서울은 자꾸 날 밀어내는 것 같은데 마땅히 반기는 곳도 없다고 느낄 때 강릉에 있는 호텔에서 면접 제의가 왔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지방 호텔 홍보팀이라니 이 양반 잘못짚으셨네...라고 생각하며 거절하려고 하는 순간,

"이 호텔에서 근무하시게 되면 객실을 제공해드립니다. 과장급이니 1인 1실이고요. 호텔이 바다 바로 앞에 있어서 경치가 매우 좋아요"


그 순간 잠시 호텔 객실에서 사는 내 모습을 상상했고 단번에 면접을 보겠다고 대답했다. 면접에서부터 채용 확정까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됐다. 그리고 막상 합격 통지를 받고 나니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남자 친구였다.


나에게는 3년을 사귀고 결혼을 약속한 남자 친구가 있었다. 나와 결혼하기 위해 집에서 분가해 대출까지 받아 전셋집을 마련한 사람이었다. 이직하면 바로 결혼 준비를 하자고 약속 했었는데 갑자기 강릉에 살러 간다는 것은 제대로 뒤통수를 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뭐? 강릉? 장난이지?"

"정말이야... 강릉에서 한 번 살고 싶어. 나 항상 서울을 떠나서 살고 싶었어. 서울 중심에 살지만 실은 나 지금 간신히 매달려 있는 느낌이야. 딱 일 년만 강릉에서 살다가 올게"

".....니가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기다려줄게"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나를 믿고 결국 내 선택을 이해하고 따라주는 사람.

그렇게 일 년만 살고 오겠다고 약속하고 3년을 기다리게 했다.


강릉으로 이사 오기 전 날 서울의 저녁 하늘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가을바람이 섭섭하게 불고 있었고, 유난히 붉었던 서울의 해가 아쉬운 듯 강 너머로 지고 있었다.

2018.9.29 반포대교에서


2018년 10월,

아는 곳도 아는 사람도 없는 강릉의 외딴 호텔방에 짐을 풀었다.  


그렇게 시작된 강릉살이. 답답한 빌딩숲 대신 피톤치드 가득한 소나무숲과 깊고 푸른 바다가 내 눈앞에 펼쳐지는 곳. 자동차 소음 대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살게 되다니 꿈만 같았다. 치열한 사람들 속에서 쓸데없이 남들과 비교하느라 나의 감정을 소모할 필요도 없고,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볼 때면 서울 벼랑 끝네 밀린 기분따윈 파도에 쓸려간 듯했다.


그렇게 서울 탈출에 성공해 강릉에 무사히 착륙. 과연 내 마음은 편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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