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두둑 Oct 22. 2021

어쩌다 우리 모두 이방인

서울 깍쟁이의 만만치 않은 강릉살이의 기록 

호텔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외딴곳에 이상한 책방이 하나 있다. 

바다에서 아주 가깝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는 한적한 도로변에 위치한 차와 술을 파는 책방이었다.


독일사람과 결혼해 10년이 넘게 독일에서 살다가 이혼 후 한국에 돌아와 강릉에 독립 서점을 차렸다는 사장님. 노란색 양 갈래 머리로 강한 인상 도장을 찍은 사장님은 성격도 노랑머리를 한 빨간머리 앤처럼 유난히 밝고 수다스러웠다. 책방 사장님이 이래도 되나. 조용히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손님을 위해 헤드폰을 준비해 놓았다는 사장님은 손님과 대화하는 것을 유독 좋아했다. 


강릉에 연고가 전혀 없는 나는 친구가 고팠던 참이었다. 회사에는 나보다 아주 어리거나 아주 나이가 많거나 아님 나이는 비슷하지만 성향이 잘 맞지 않는 직장동료들이 대부분이어서 사적으로 친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수다를 좋아하는 책방 사장님과 친구가 필요했던 책방 나는 취향이 잘 맞아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 이후 퇴근 후에 자전거를 타고 책방에 가서 눈치 보지 않고 천천히 북쇼핑을 했다. 소파에 늘어져 책을 펴놓고 사장님과 수다를 펼치다 한 장도 못읽고 온 적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책 이야기도 했고, 책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생 이야기도 나누었으므로 나름 알찬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씩 사장님은 직접 만든 독일식 파이를 내어주셨다. 책방 영업이 끝나면 와인을 따고 하얀 벽을 스크린 삼아 영화를 보기도 했다.  


어느 수요일. 책방 사장님이 독서모임이 있다며 마침 책방 단골들이 함께 모이는 날이니 너도 놀러 오라고 했다. 존칭 대신 너라고 했고 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으니 공식적으로 나는 단골로 인증 되었고 우리는 서로 편하고 친해진 것이 분명했다.


퇴근 후 호텔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 들고 책방으로 향했다. 멀리서 봐도 어두운 길목에 밝게 불이 켜진 책방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는데 꼭 연극무대 같이 보였다.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에 위치한 책방은 낮에는 그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밤이 되면 통유리 때문에 안이 훤히 보여 멀리서도 눈에 띄는 곳이었다. 나는 연극무대에 등장하듯이 책방으로 입장했다.


책방엔 얼핏 봐도 다양한 연령대의 일고여덟 명 정도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소개하고 있었다. 나는 회사가 아닌 밖에서 강릉 사람들과 소통할 기회가 생기겠다는 기대감에 은근히 설렜다. 당시 은근히 서울병이 있었던 나는 강릉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 꽤 멋지고 자랑할만한 지방살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친화력이 좋아 누구하고도 잘 어울리던 책방 사장님의 단골들은 정말 다양했다. 책방 건물 3층에 사시는 헬기 기장님은 책은 읽지 않지만 맥주를 마시러 종종 책방에 들리신다고 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온 작고 깡마른 여자분은 유난히 헬기 기장님과 말이 잘 통한다 했더니 공군 대위 출신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산림청에서 일하신다는 연구원님은 본인을 독신주의자라고 소개했다. 갑자기 강릉으로 발령나 좌천되었다는 생각으로 삶의 의욕이 없던 찰나 책방에서 독서모임을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하셨다. 그날 이후 연구원님은 책방 독서모임에서 만난 분과 1년도 되지 않아 곧 결혼하셨다. 20년이 넘게 클래식 작곡과 피아노 연주를 하시다가 지금은 강릉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하고 계신 언니는 손님이 퇴실하면 빨래를 돌리고 수건을 반듯하게 접는 일이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일과라고 했다. 피아노를 치며 생긴 강박증을 수건 접는일에 활용한다는 언니. 게스트하우스에 직접 가보니 역시 수건들이 호텔보다 더 날카롭게 칼각이 잡혀 가지런히 쌓여있었다. 


그렇게 뭔가 범상치 않은 프로필을 가진 사람들과 늦은 밤까지 대화를 이어가다 갑자기 누군가 “어머!”라고 외쳤다. 어쩌다 보니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강릉 토박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강릉의 이방인들이었다. 


이방인이 차린 책방에 모인 이방인들의 모임이라니. 마치 어떤 소설 속 한 장면 같아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도 이제 강릉 친구가 생기는가 했는데 모두 어딘가에서 강릉으로 오거나 보내진 사람들이라니. 

이런 말도 안되게 웃픈 우연이라니. 


2년 후. 책방 사장님은 책방을 정리하고 돌연 독일로 다시 돌아갔다. 나도 강릉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 언니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영업을 접고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어쩌면 강릉에서 정착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던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듯 했다. 그러나 사실은 아직도 인생이라는 길 어딘가의 이방인이 아닐까.   

이전 02화 나는 호텔에 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