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나를 믿는 시간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by 정새롬

#캄보디아 #프놈펜 #씨엠립

#짜장면 #배달의민족

#2017년3월


스물두 살의 여름 방학, 우연히 본 친구의 미니 홈피는 여행으로 가득했다. 그때 나는 오후 3시부터 새벽 3시까지 횟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같은 해 겨울 방학에는 서점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찾아온 스물세 살의 여름 방학. 그 해에도 역시 오전에는 레스토랑 오후에는 맥주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겨울 방학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나에게 여행은 상상도 못 할 사치였고, 영원히 그 시간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여행과 일상의 환상의 콜라보레이션>

이른 아침 베트남에서 캄보디아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고 국경을 넘어 시골길을 달린다. 창밖의 익숙한 풍경들을 보며 문득 지금보다 어린 날의 나를 떠올렸다. 늘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아 복잡했었고, 그 틈새로 간혹 슬픈 날도 많았다. 그 시간들을 견뎌오며 알게 된 사실 하나는, 걱정해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지고, 시간이 흐르면 그 간격은 자연스레 오므라든다. 나의 20대는 이것을 깨닫기 위해 많은 진통을 겪었다. 그리고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롯이 자신만이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나를 놓아주기로 했다. 미래와 또 그 미래의 미래까지 걱정하던 가치 없는 시간들을 과감히 버렸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자신을 용서했다. 스스로를 걱정 속에 내버려 두었던 지난 시간들을 위로했다. 그렇게 마음과 생각이 궤도를 바꾸니, 어느 날 삶은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영영 가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여행의 순간 속으로.

<천원 짜리 바게트 샌드위치에 행복 만랩 달성,>

중간중간 정차해 간식도 먹고, 시장 구경도 하며 도착한 곳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하루만 묵고 다음 날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으로 이동하기 위해 터미널 근처 숙소를 예약을 했다. 하지만 도착하고 보니, 씨엠립행 버스는 우리가 내린 터미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가. 휴. 이럴 줄 알았으면 숙소를 출발하는 터미널 근처로 잡았을 텐데,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예약을 취소할 수 없었기에 무거운 짐에 땡볕까지 등에 없고 20분을 걸었다. 우리가 묵을 호스텔은 20년 전 내가 살던 동네와 흡사한 분위기의 골목에 있었다. 1층은 작은 레스토랑이고, 2층과 3층에 방이 있었다. 1층에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의 경사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계단 하나의 높이가 거의 40cm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방을 안내해 주던 직원에게 헛웃음을 웃으며 '왓?!'이라고 하자 그도 빵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등반하여 입성한 방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6인실에 큰 사물함과 큰 수건과 큰 이불이 제공되었다. 거기다 웰컴 드링크로 맥주와 탄산음료 중 마시고 싶은 것 하나를 고를 수 있단다. 하루 1인 5달러인데, 1달러짜리 음료를 공짜로 준다는 것이다. 뭐지. 이 엄청난 서비스 마인드는.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호스텔에서 씨엠립으로 가는 버스 예약 가능! 1인당 13달러를 내니 사장님이 즉석에서 표를 발권해주신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픽업 봉고가 와서 우리와 짐을 싣고 터미널까지 편안하게 데려다주었다. 정말이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늘 감동의 도가니탕을 사발로 마신다.

<게스트하우스 마당에 머리 산발한 야자수가 멋지다>

그리고 또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 도로를 5시간 정도 달려 그 유명한 씨엠립에 도착했다. 이번 도시에서는 한국 여행자들을 만나보고 싶어서 한인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시설이 깔끔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묵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여행을 할수록 숙소를 정하는 기준이 점차 간결해지고 있는데, 필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에어컨. 둘째 에어컨. 셋째 에어컨. 넷째 노진드기.


진드기가 있는 건 정말 최악의 전개이고, 에어컨이 없는 건 우주 최악의 전개라는 사실을 2달간의 여행을 통해 뼈저리게 배웠다. 때문에 보통 에어컨이 있으면 '좋네~'가 나오고, 거기에 개인 화장실이 딸려 있으면 '어우야 엄청 좋네 궁궐이네'가 나오게 세팅되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 게스트하우스는 궁궐이다.

<지금부터 널 내 방석으로 임명한다. 쓰다듬어라 닝겐아.>

이곳 게스트하우스는 하루 2인 15달러이며, 아침에 빵과 계란과 커피로 이루어진 조식을 준다. 뽀송한 수건과 아이스박스에 담긴 시원한 물이 카운터 옆에 항시 준비되어 있어 언제나 필요할 때 가져다 쓸 수 있다. 그리고 매일 시전해야 하는 손빨래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줄 두 대의 사랑스러운 세탁기와 대동여지도도 걸 수 있을 것 같은 시원시원한 빨래 줄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매니저 '보타나'까지.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한 모든 것이 이곳에 있다. 특히 이곳 사장님께서 매달 업데이트하고 계시는 씨엠립 지도는 정말 완벽에 가깝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은 조식을 먹으러 내려와 소파에 앉으면 고양이가 폴짝 뛰어올라 무릎에 앉는다는 것이다. '뭐지, 초면에 왜 이렇게 친한척하는 거지.'라는 생각에 가라고 손짓하면 무시하고 잔다. 에휴. 귀여운데 너무 뜨끈뜨끈하다. 이제 좀 내려가.

<한 입 먹고, 행복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도시의 놀라움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주인장 아저씨가 만든 지도를 살펴보다 남편이 발견한 '진짜루'.

남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한국 짜장면집 아니야?'. 검색으로 번호를 알아낸 뒤,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한국분이 '여보세요'라고 한다. 우어. 배달하면 배달비가 얼마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신다. 그럼 짜장면 하나 짬뽕 하나 탕수육 소 다 합하면 얼마냐고 물었다. 18달러라고 하신다. 도착한 첫날 우린 하루 종일 휴게소에서 먹은 빵 하나가 전부였기 때문에, 15달러라는 식비가 온전히 남아 있었고 다음날 예산을 조금 땡겨와 미친척하고 주문을 해버렸다. 20분 뒤, 오토바이 소리가 나고 현지인이 짜장면을 우리 방 문 앞까지 가져다주었다. 뭐지. 이 미친듯한 배달의 민족은. 옛날에 배 위에서 '짜장면 시키신 분'을 외치던 이창명 아저씨한테 이 사실을 꼭 말해주고 싶어 졌다. '아저씨, 캄보디아 씨엠립에도 짜장면 배달이 돼요'

<단기 속성 특강, 앙코르 국립 박물관 만랩 도전>

둘 째날 여유롭게 뒹굴 대다가 대량의 밀린 빨래를 돌렸다. 오랜만에 상콤하게 탈수가 된 빨래를 널고 있으니 기분까지 상쾌했다. 흐린 날이어서 햇볕에 말린 것처럼 바싹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비만 안 온다면 대만족이다. 빨래를 널어 두고 슬슬 걸어 앙코르 국립 박물관 구경에 나섰다. 내일부터 진행될 앙코르 유적 구경의 워밍업을 위해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 2시간 반 동안 속성 특강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책자를 열심히 뒤지며 곧 만나게 될 앙코르 톰과, 몇몇 사원들에 대해 공부했다. 이렇게 열심히인 이유는 한국어 투어 비용이 비싸 내가 직접 남편을 가이드해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크메르 문명, 알면 알수록 너무나 매력이 넘친다. TV에서만 보던 그 어마어마한 광경들을 내가 직접 본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대한민국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것 같던 나날에서, 대한민국 밖 모든 나라들을 걷고 있는 오늘로의 변화. 한계에 갇힌 스스로를 놓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힘들어했을 것이다. 변화는 하나의 점에서부터 시작한다. 할 수 있다와 없다의 차이도 단 하나의 글씨에서부터 시작한다. 때문에 단 하나만 바꾸면 된다. 내 안에 나를 가두는 그 쪼잔한 한 가지만 바꾼다면, 삶의 풍경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길도 답도 쪼잔함도 버릴 수 없을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건 아마 시간의 도움을 받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시간 속에서 이리저리 넘어지고 치이며 조금 더 단단한 사람으로 자라다 보면, 어느 날 나도 모르게 그 쪼잔함을 버리지는 못해도 저구석으로 밀어 넣을 수는 있게 될 것이다. 꼭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1.마음이 말랑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