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한번 쏴 쏟아놓아 보았어요. 부분 부분 더 단단하게 알차게 공부해서 채워 나가려고 합니다. 일단 살짝 손가락 끝에 약간의 감정을 실어 다다다다 하였습니다. 점차 진화되어 책이 되어 가는 과정을 응원해주세요!
[1-4] 모성이데올로기
2012년 7월 아이를 출산하고, 숭고한 엄마의 역할을 시작했고, 제법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시간을 지나, 세상 육아서에서 읽히는 모범적인 엄마의 노릇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점차 깨달았어요. 그렇게 덕목만을 나열한 책들은 우리의 부족함을 계속 뼈때리기 할 뿐, ‘알겠나이다~~’ 하며 바로 내재화할 수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요. 이 시대의 저와 같은 엄마는 어떤 생각과 태도를 지녀야 할 지 너무 혼란스러워 이런 저런 책을 집적거렸습니다.
범인(凡人)의 조언은 괜히 비아냥거리고 싶어질 것 같아서, 무언가 초월한 분의 가르침을 받아보고자 법륜 스님이 쓰신 ‘엄마 수업’을 읽기 시작했는데요. 역시 시작부터 진리를 아주 진리답게 편안하게 읊어내는 문구들이 저를 명상의 흐름에 이르게 하였고, 그 문장들에 저를 편안하게 싣게 되었어요. 의탁하고 싶게 만들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떤 문장을 딱 마주치고는 그 순간 그 책을 덮어버렸고, 그 책을 다시는 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법륜 스님이 쓰신 어떠한 책도 보지 않게 되었으며, 그 분이 나오는 어떤 영상도 클릭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아이가 태어나서 3년까지는 엄마가 키워라.
자기의 권리를 따지다 보면 고스란히 아이에게 피해가 간다, 아이가 큰 후에는 아이를 버려 둔 인연의 과보가 고스란히 엄마에게 고통으로 찾아온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회적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 현재, 이 깊은 진리를 깨우치고, 부득이하게 수행적인 자세로 임하라는 요지입니다. 가뜩이나 사방팔방에서 아이에게 특정 시기에 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결정적인’ 교육 콘텐츠가 공포 마케팅되고 있는 마당에, 이 결정적인 3년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이 책의 전체가 ‘부정’되었습니다. 부지불식간이었습니다. 더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기실, 모성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현재의 여성은 이 말씀이 맞다는 것을 저 밑 마음토양에 깔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자아와 상충하는 이것에 대해 떼쓰며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을 겁니다. 반드시 그렇지 않으리라는 근거를 짜내고 싶을 겁니다. 3년 간 엄마와 아이 간에 쌓아 올려질 그 가치로움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심지어 수많은 연구들이 그것을 증명해내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여성을 그 프레임에 가두어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려는 음모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관점에 따라, 지배 권력에 따라 조작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법륜 스님은 사회적으로 제도를 만든다면, 3년의 유급휴가를 주는 것이 옳고, 그것이 안된다면, 유급과 무급을 섞어 3년을 보내도록 하면 된다는 제안도 주셨네요. 회사의 보육시설, 재택근무 등의 제도를 통해 배려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하네요. 3년간 계속 급여를 지급할 회사가 있을리 만무하고, 긴 무급의 시간이 엄마의 효능감을 상실케 할 것이 자명합니다. 또한, 보육시설, 재택근무 등은 3년 동안의 온전한 아이 양육과 양립할 수 없는 제도입니다. 돈도 중요한 문제이긴 하나, 초점은 ‘경력’의 지속성입니다. 3년 동안의 공백은 그 다음의 삶을 불확실성으로 검게 칠해 버리기 때문에 그 이후 공백에 다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기까지의 추가적인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 추가적인 시간을 사회에서 용인해주고 있을까요? 그 다음 돌입할 노동을 위한 사전 투자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해줄까요? 절대 아니지요. 엄마에게 3년이라는 모성의 굴레를 지우기 때문에 이 사회는 적극적인으로 제도를 만들지 않고 버티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3년이라는 결정적 요인을 두지 않더라도 엄마는 아이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노력을 자기 나름대로 해나갈 것입니다. 사회구성원의 긍정적 인격의 형성으로 양질의 노동력을 양산하는 데에 3년이 이토록 중요하다면, 그 3년에 대한 엄마에 대한 경력도 사회제도적으로 인정하여야 할 뿐 아니라 인정되는 경력이라면 당연히 유급이어야 마땅하죠. 그런데 은근히 엄마에게 모두 떠넘기면서 출산장려금 약간, 경력잇기 지원금 또는 지원서비스 약간 등 근본적이지 않은 접근만을 메뉴 구성해놓고 있는 실정이라고 봅니다.
책의 거의 초반, 50쪽 남짓 넘어가는 지점에 있던 이 문구 탓에, 책을 거의 읽지 못하고, 책값 아깝게시리 그냥 책장에 꽂아버렸습니다. 뭘 모르면서 떠들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에 대한 구분이 없는 오만한 발언이 아니었나 감히 말합니다. 모성을 자극하며, ‘돈이 급한 것도 아닌데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것이 어떠 하겠느냐?’ 는 옛 상사의 발언도 다시금 생각나며 "옳지 않다." ‘평결’을 전달하고 싶군요.
이렇게 강요되는 모성에 나를 던지고 열과 성을 다하여 엄마의 역할을 설계하게 되면서, 아이에 대한 억압을 합리화하는데 유용하게 쓰이는 것도 모성이데올로기입니다. “다 엄마가 너를 사랑해서, 너 잘 되라고 한 거란다.”라는 대사를 수시로 듣습니다. 아이가 하나의 주체로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는 전략이라는 듯이 모성의 틀 안에 가두어 버리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각종 장사치들의 강력한 유혹과 더불어 더욱 합리화되고 강화됩니다.
‘오나 도나스’가 쓴 <엄마됨을 후회함>은 엄마가 되었다는 것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놓은 ‘엄마 프레임’에 나를 맞추는 것으로 ‘엄마하기’를 하는 것을 후회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여성성을 갖춤과 동시에 엄마의 역할을 하고 게다가 일까지 훌륭하게 해내는 수퍼우먼이 되면 이 사회는 “와우” 해주잖아요? 그것에 맞추다 우리 숨넘어갑니다. 정작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하게 되지요.
모성이데올로기 때문에, 내가 아이에게 하는 모든 것들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또한 더 하지 못하는 것에 늘 죄스러운 마음을 갖습니다. 아이 출생 후 3년은 물론, 수시로 찾아오는 결정적인 순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모성은 질책의 대상이 됩니다. 아이의 출생과 성장, 아이의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숙지가 모성에 쏠려있기 때문에, 정보를 가장 많이 갖고 있고 판단에 가장 효율적인 모성이 1순위로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이 때문에, 섣불리 아이의 양육과 교육에 참견하는 남편이나 그외 가족에 대한 횡포도 합리화되기도 합니다. “내가 제일 잘 알고, 그 동안 노력해서 이까지 끌고 온 것이 나이거늘! 감히 다른 것이 옳다고 주장말라. 닥치고 있으라.”는 태도가 가끔씩 올라오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 그 순간마다 확실히 느껴져서 무섭습니다. 그렇게 살기 싫기 때문입니다.
Photo by Jenna Norman on Unsplash
여러분의 모성은 혹시 어떤 방향으로 치닫고 있나요? 어떤 정도로 조절되고 있고, 조절을 위해 취하는 전략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