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준이란 것이 과연 존재나 하는 것일까?
제대로 된 판단이란 것이 1도 없는 것 같은 기분일 때가 있다. 인생에 여러 사건들이 뒤엉키어 발생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 또는 완료되는 것이 없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그런 느낌 말이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이끌려 살게 되고, 그 타성은 형성이 되고 유지된다.
개인의 어떤 '결정'이라는 것은 사실 온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객관적인 근거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다 쓸 수 없으므로, 근거에 대한 선택이란 것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선택이라는 것은 개인의 주관, 즉, 이끌리는 것에 기대어 이뤄지게 된다. 그 선택된 근거들이 아무리 객관적인 것들이라 하여도 이미 주관적인 잣대에 의해 한정 지워진 근거들이다. 그러고 나서 한창 그 근거들을 살피며 결정을 향해 다가가고 나서는, 마지막 결정과 그 근거가 이끌어온 최종 지점 사이에 여전히 간극은 존재한다. 그 간극에서 이뤄지는 점프는 결국 나의 기분, 취향에 의해 방향이 결정된다.
그렇다고 근거 수집과 결정의 과정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주관적으로, 내 기분대로 결정할 거 과정 생략하고 그냥 해버리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점핑의 거리가 멀수록 최적의 결정에서 벗어나는 오차 범위는 커지게 된다. 최대한 근거를 많이 끌어당기어 요리조리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알게 모르게 내 중심에 자리 잡은 '바른 길' 기준 근처로 끌어당기는 근력이 키워지는 시간인 듯하다. 그런 노력을 통해 나의 '결정'들은 일정 정도의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고 삶의 안정감을 가져다주지 않는가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혼돈의 시간은 정신을 어디다 빼놓은 채, 고민의 근육에 힘을 빼놓은 채 그대로 방치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는 저기 던져 버리고자 한다. 내 삶에 대해 내가 책임져야 하거늘, 한계를 내가 그어 놓고 무기력하게 되는대로 이끌려 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원인을 외부로 돌리면서 어떤 일의 발생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곤 하였다.
다루어야 했던 변수의 수가 지금보다 훨씬 많이 적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가 그립기도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모르고 나름 잘 매니지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던 시절이기도 하다. 혼란스럽고 어두웠던 터널을 통과하면서 지금은 그나마 희미한 불빛 하나가 보이며 한 켠에 조금씩 안정감이 깃들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나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주변 가족의 시간 자원, 물리적 자원을 쓰면서 나의 안정감을 그나마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급 겸허해진다. 내가 내 삶을, 내 삶을 구성하는 요소를 대상으로서 매니지하고 있다는 오만한 생각은 버려야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남의 힘을 시시각각 빌리고, 의존하고, 그 틈을 타서 나를 추스르고, 그나마 나 자신과 내 주위를 둘러보고 뭐라도 어찌해 볼 힘을 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긴 알지만, 사실 짜증도 난다. 아직 뭔가 받아야 할 것을 못 받은 것 같고, 더 할 수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못 했던 것만 같은, 이 억울함과 원망의 감정을 어찌하지 못해서이다. 어쩌면 많이 받았던 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비어있는 것만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 모르는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
나의 가장 흔들리지 않는 중심 근육은 어떠한 가치와 강하게 붙어 있을까? 그것을 언제 발견하게 될까?
작년, 2021년 어느 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