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헛둘헛둘 포기하지 말고!
글을 쓴다는 것은 한 마디로 좋은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이 주는 감정들 중 단연 으뜸은 조금씩 내 속을 밝혀주는 빛 같다는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타오를수록 내 속은 점점 더 밝아지겠고, 그래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구석은 늘 존재하겠지만, 점점 '아이고, 이제 좀 낫네...' 하는 생각을 갖겠지.
뇌가 복잡한 것인지 마음이 답답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이 지속되어오고 있었다.
굉장히 쓸 것이 많은 것 같은 느낌임과 동시에 쓸 것이 하나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역시 농땡이를 치고 뒹굴거렸더니 하나 살짝 잡혀 올라오는 토픽 하나가 있었다. 사람은 역시 놀고먹고 머리를 비워내야 뭐가 들어오는 게다.
나의 가장 큰 정체성 중 하나는 부모로서 아이의 삶에서의 메인 코치이다. 아이의 컨디션을 살피고, 아이의 감정, 재능, 능력, 역량, 기량 등 온갖 갖고 있는 것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아이에게 적용이 잘 될만한, 아이의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선별한다. 그리고 아이의 퍼포먼스를 끌어올리기 위한 다양한 방식의 채찍과 당근을 운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의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것', '아이의 퍼포먼스', 이 두 표현을 채우는 내용성을 정함에 있어, 아이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채워지기도, 들락날락거리기도 하는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일 것 같다. 아이를 지도함에 있어 '일관성'을 많이 강조하곤 하는데, 그 일관성이란 것이 유지되려면, 어느 한쪽으로 결론을 내리는 일을 삼가하여 늘 열어두면 거의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절대적'이라고 함부로 규정해서 아이에게 적용되는 규칙을 만들어놓아 버리면, 그리고 그런 규칙의 개수가 너무 많아지게 되면 그중에 몇 개는 잊어버리고 제대로 적용되지 않게 되거나, 반드시 하여야 할 것으로 정해놓은 것이 적용되지 못하는 상황도 도래하게 되더란 말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생각의 여러 갈래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아이와 지내왔다. 절대 안 되는 것 빼고는 대체로 하는 것으로 하였고,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되는 경우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예민하게 파르르 거리며 금지시키곤 했다. 가능한 긴 설명에 설명을 거듭해서 아이를 이해시키고 행동하게 하였는데, 사실 그렇게 키우다 보니 부작용이 없진 않다. 한 마디만 해서 아이를 움직이게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늘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아이는 자기 나름의 논리를 세웠다. 그래서 참 피곤하기는 하다. 때론 "이건 하라면 하는 거야. 네가 아직 이해할 힘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엄마가 아무리 설명해도 네가 모르는 거야. 너의 완전한 편은 나뿐이니까 일단 엄마를 믿고 따라!"라고 성질을 내기도 한다.
어쨌든 나라는 사람이 '단정 짓기'를 못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우유부단한 면도 많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에 포함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아이에 대해서도 사실 그렇게 실천하게 된 것이다.
아이의 퍼포먼스를 구성하는 내용성을 정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위에서 언급하였는데, 내가 집중하는 부분은 세상에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힘인 것 같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렇다.) 가치판단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근거를 들어 내려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세속적 퍼포먼스가 어떻게 세속적으로 평가되든, 나름의 의미를 찾고, 나름의 우선순위를 매길 줄 알면 그것으로 족할 것 같다. 내가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가장 큰 불안은, 아이가 어른의 섣부른 판단으로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외부의 어떤 평가에 의해 자존감에 상처를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준비가 아직 덜 된 아이에게 그럼 세속적 기준의 어디까지 충족시켜 줄 것인가, 하는 것은 부모의 숙제이겠다. 물론 그 '어디까지' 역시 아이와의 상호작용 중에 오르락내리락 또는 양옆으로 움직이겠지만 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