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가니, 전후 맥락은 다 잊히고 이미지만 남아 있는 기억이 있다. 누구와 함께였는지,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 모두 잊히고 무심한 풍경만 생각난다. 삶의 풍랑을 좌우하던 사람들과 이벤트와 목적의식과 강렬했던 감정은 다 사라지고, 아무것도 아닌 듯한 배경 같던 풍경이 전경이 되어 기억을 차지하고 있다. 신기하다... 결국 삶은 어떤 해석으로도 손상되지 않은 이미지 자체인가.
1.
어느 산이었는지, 누구랑 갔는지, 정확히 어느 계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좁은 산길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걷다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자기 탁 트인 시야 앞에 펼쳐진 풍경만 생각난다. 절도 아니고 일반 집도 아닌 듯한 크기의 기와지붕 집과 담벼락, 그 옆 옹기종기 모여있던 장독들, 그 모든 것과 어우러져 있던 초록 덤불과 나무들. 파란 하늘을 흘러가던 흰 구름들.
2.
함께 일했던 협력업체 사람들과 같이 회식으로 저녁을 먹었던 것 같다. 지하에 있던 식당에서 맛있고 배부르게 먹고 계단을 올라와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모두 포만감과 거나함으로 웃음 섞인 수다를 떨었다. 구체적인 사람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 해가 지지 않아 환하던 저녁 햇살, 계단 옆 나지막하게 기댈 수 있던 시멘트 턱에서 전해져 오던 온기, 삼삼오오 서있던 사람들의 실루엣과 긴 그림자만 떠오른다.
3.
무슨 일이었는지는 잊었지만, 광화문 근처에서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온갖 싸구려 잡화를 늘어놓은 자판이 즐비한 지하상가를 지나오던 중, 문득 오디오 가게에서 비장한 헨델의 사라방드가 불협화음처럼 흘러나와 걸음을 멈추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득한 계단을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 좀처럼 오지 않던 버스를 기다렸다. 광활할 정도로 넓게 느껴지던 10차선 도로와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과 흐린 하늘과 높은 잿빛 빌딩 사이에서 조그만 점처럼 서 있었다.
#이마저도_까먹기_전에
#조각조각을_이어_퀼트이불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