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BL에 스며들다
나는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다. 작법서만 몇 권 읽었을 뿐. 각 잡고 오랫동안 글을 쓴 것도 웹 소설이 처음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나는 글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를 전공했다. 심지어 지금 회사에서 하는 업무도 글쓰기와 전혀 무관하다. 하루 종일 숫자와 씨름하는 일인데, 그런 내가 글을 쓰고 있다니. 아직도 아이러니하다.
1년에 책을 350권씩 읽고 리뷰를 쓴다고 해도 글을 읽는 것과 쓰는 것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다. 전혀 달랐다. 글은 금방 읽어버리지만, 문장을 쓰는 일은 그보다 배로 시간이 걸렸다.
책을 읽다가 이 정도의 글이면 나도 쓰겠는데, 싶어 글쓰기를 시작하면 그 책보다 더 못한 글이 나올 때가 있었다. 그만큼 나에게 글쓰기란 어렵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재미로 웹 소설을 읽었다면 이젠 분석하며 읽었다. 어떤 단어를 쓰는지, 어떤 전개가 인기 많은지. 평소 책 읽기와 한 세트인 독서 필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좋은 문장들은 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글쓰기가 즐거운 것처럼 여러 BL 작품을 읽고 탐험하는 일조차도 너무 행복했다. 귀한 문장을 찾을수록, 멋진 작품을 발견할수록 내가 쓰고 있는 BL 웹 소설이 발전하는 기분이었다.
BL의 성지에서 무료 연재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봐주시고 댓글도 남겨주셨다. 매일매일 새로고침하는 행복에 젖어있었다.
다음 화를 쓸 힘이 생겼다. 웹 소설 쓰기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훗날 씁쓸함을 잔뜩 머금게 된다는 사실도 모르고 과거의 나는 정말 신이 났다.
지금까지 책 읽는 거 외에 이렇게까지 집중해서 했던 일이 없었다. 그래서 더 즐거웠고, 의욕이 마구 샘솟았다.
BL 웹 소설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내 삶은 BL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1년 동안 접했던 BL 작품으로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소설을 잘 써서 많은 분이 읽어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유행하는 키워드를 알기 위해 최근 출간된 BL을 리디에서 구매하여 읽었다. 월급으로도 충분히 캐시 충전을 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블로그로 얻은 수익으로 충전했다. 조금씩 모은 소중한 금액을 값진 곳에 썼다는 뿌듯함이 들었다.
영상을 보지 않는 내가 OTT도 결제했다. BL 드라마와 영화를 보기 위해서. 1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인공뿐만 아니라 배경과 대사까지 다 외우려고 하는 집중력 때문에 드라마를 오래 보지는 못했다. 다행인 게 BL 드라마는 길지 않아서 소화하기 편했다.
출퇴근 지옥철 안에서 BL 웹 소설을 읽고 퇴근 후 집에서 식사하면서 BL 드라마를 봤다. 잠들기 전까지는 BL 웹툰을 봤다. 그사이 틈틈이 내 소설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종일 3,200자를 모았다.
변화를 싫어하는 내가 삶을 조금씩 바꿔나가고 있었다. 오로지 BL 웹 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변화를 싫어하냐면, 23년의 우정을 지켜온 친구, 20년 동안 함께하고 있는 연인, 14년째 근무하고 있는 직장, 19년째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
내 주변의 오래된 것들을 사랑한다.
BL 웹 소설, 웹툰, 드라마, 영화뿐만 아니라 또 바꾼 한 가지가 있다. 다음 나열한 노래 제목을 보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1. 너예쁨 - 태호
2. Beautiful Day - 블리처스
3. 오늘 하루만 - CITI(시티)
4. Romantic Devil - 콜딘
5. 꿈속에서 - 콜딘
6. Traffic Accident - 단 & 무진
7. 네가 그리워서 - 기현우
8. Dream of you - 김지웅 & 윤서빈
9. 쿵덕쿵덕 - Soon
10. EVERGREEN - OnlyOneOf (온리원오브)
11. 나라고 말해 - 블리처스
12. Gamble For Luv - 여름 (우주소녀)
13. Stay Your Night - 옥진욱
14. Lucky Strike - 현성
15. Love Breeze - 지진석
16. My Everything - 플라워 (Flower)
BL 드라마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바로 알아보셨을 것이다. 드라마 OST다.
90년대 댄스곡과 발라드로 범벅되어 있던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BL 드라마 OST로 몽땅 바꾸었다. 요즘 인기 있는 노래보다 내가 태어나기 전 발표된 곡 또는 어릴 때 들었던 가요가 좋아, 항상 귀에 익숙한 음악만 들었다. 그런데 수십 년 만에 플레이 리스트를 갈아엎었다.
재밌는 BL 드라마를 볼 때마다 하나씩 모은 OST를 종일 들었다. 드라마를 봤을 때 그 감정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지켜왔던 습관들을 다 바꿀 정도로 나는 BL 웹 소설 쓰기에 진심이었다. 흥미로운 글을 잘 쓰고 싶었다. 정신없이 BL에 빠지는 동안 가슴 속 깊이 눌러두었던 작가라는 꿈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작가라는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너무 멀리 있어, 허망한 소망처럼 느껴졌다. 문학상을 받아 등단하는 경로는 너무 높아, 아예 쳐다보지도 못했다.
어느 책에서 등단하지 않은 작가는 무면허 작가로 불린다는 내용을 봤다. 뇌리에 콕 박힐 정도로 충격이었다. 작가는 되고 싶은데 등단은 머나먼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등단을 못 하면 작가는 될 수 없는 걸까?
그래도 즐거우니까 나는 글을 썼다. 아마 제대로 글쓰기를 배웠다면 웹 소설에 가까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더 높은 무대를 꿈꾸지 않았을까? 나는 오히려 글쓰기를 웹 소설부터 시작해서 좋았다.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어서.
웹 소설은 그저 내가 상상한 것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서 좋다. 큰 욕심 내지 않고 무료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웹 소설의 벽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
이렇게 행복한 글쓰기가 어디 있을까. 내 삶을 뒤집어 놓을 정도로.
나는 과연 무사히 첫 웹 소설을 완결까지 끌고 갈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