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기승전결이요? 그런 거 잘 모르는데요.
나의 MBTI 마지막 유형은 대문자 J다. 매일 아침 다이어리에 매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업무를 쪼개서 적는다. 심각할 때는 분 단위로 세분화하는 엄청난 계획형 인간이다.
회사 업무는 물론 독서와 블로그 리뷰 쓰는 시간을 조각조각 각 나눠서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장단점을 만나볼 수 있다. 먼저 장점으로는 할 일을 정리함으로써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정해진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 내가 정해놓은 시간표를 보고 움직이면 되니까 편하기도 했다. 당장 해야 할 일, 조금 미뤄도 되는 일도 구분할 수 있었다.
계획하며 움직이는 날이 수년간 지속되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휴대폰처럼 꼭 붙어 다니던 다이어리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욕심내서 짜놓은 시간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해, 다음날로 업무를 미뤄야 할 때가 힘들었다.
다이어리에 완료한 업무를 동그라미 하는 맛에 매일 열심히 살았다. 빼곡히 적혀 있는 할 일들을 보고 나는 잘살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할 일을 모두 완료하지 못했다는 서운함과 압박감에,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다이어리에 동그라미가 줄어들 때서야 깨달았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
살다 보면 예측할 수 없고 내가 막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일이라면 빠르게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과거의 나는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인정하는 방법을 몰랐다. 심지어 갑자기 일어난 일 때문에 계획한 일이 틀어지는 게 너무나도 큰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과감히 수년간 써오던 다이어리를 없앴다. 매달 행사나 정말 중요한 할 일은 휴대폰 메모장에 남겼다. 매일 할 일을 다이어리에 적을 때는 하루를 계획하지 않으면 절대 못 살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엉망일 거라고, 상상하기도 싫었다.
막상 계획 없이 하루를 보내도 내가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있었다. 오히려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실망하지 않아서 좋았다.
웹 소설 한 번 써볼까? 하고 드릉드릉 시동을 걸고 있을 때였다. 매일 할 일을 나열하지 않아도 충분히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시기와 맞물렸다.
나는 변화와 새로운 일에 대한 거부감이 남들보다 엄청 크다. 그 이유로 한 남자만 20년째 만나고 있고, 지금 회사도 14년째 다니고 있다. 그 정도로 익숙한 것에서 오는 안정감을 좋아한다.
그리고 1초라도 가만히 있는 것을 싫어한다. 20대 때 암 진단을 받고 나니,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한순간이라도 나에게 이득이 되는 시간으로 알차게 보내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벌려놓은 일들도 많고, 취미 생활도 많아졌다. 물론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해서 스도쿠나 뜨개질, 독서 등등의 정적인 취미 생활을 선호한다.
대문자 J의 취미 생활은 준비하는 과정이 길다. 새로운 일을 도전할 때는 A부터 Z까지 모두 준비되어야 시작한다. 어떤 일은 시작하기도 전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쳐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 준비성이 철저해서 좋지만, 반대로 도전해 보지 못한 일들이 늘어나 아쉬웠다.
'일단 시작하라.'
자기 계발 도서를 읽을 때 많이 보는 문장이다. 대문자 J에게는 두려운 조언이지만, 맞는 말이다. 나처럼 준비만 한 세월 하다가는 절대 시작하지 못한다.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바로 실패를 두려워해서 출발하지 못하는 경우다. 해보지도 않은 일에 실패할지 두렵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내가 상처받고 무너질까 봐 걱정되었다. 실패를 인정하지 못했다.
각종 미디어에 등장하는 유명한 사람들을 보면 다들 성공의 미소를 짓고 있다. 처음부터 높은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이들도 수많은 실패를 겪었다. 성공에 닿기 위해 실패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실패 없는 성공은 없다. 무조건 성공의 길로만 간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다. 실패의 길을 만났을 때,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면 된다. 성공으로 갈 수 있는 여러 갈래의 길 중에 쓸데없는 실패의 길을 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