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갑자기 BL 이요?
"안녕하세요. 1년에 300권 이상 읽고 리뷰 쓰는 도서 인플루언서 김토실입니다."
"종일 책 읽고 콘텐츠 만드는 작업을 하시나요?"
"그러면 참 좋겠지만, 평일에는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입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 읽고 리뷰 쓰는 일이 가능한가요?"
네, 가능하더라고요.
취미가 독서라고 말하면 다들 놀란다. 요즘 영상을 보지 누가 책을 읽나, 회사 일도 하면서 독서는 물론 리뷰까지 가능한지 의심하기도 한다.
여기서 더 놀라운 사실은 숨 쉬듯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공기 없이 살 수 없듯이, 음식을 먹지 않고 일상생활을 할 수 없듯이.
나는 하루라도 책 한 장이라고 읽지 않으면 너무 우울하고 가슴이 답답하다. 종이책을 선호하지만, 종이책을 읽을 수 없다면 전자책이라도 꼭 봐야 한다. 너무 바빠 부득이하게 한 문장밖에 못 읽더라도.
심지어 나는 책을 읽으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감정노동 최악의 직장인 콜센터에 다니고 있다. 거의 스트레스와 매일 함께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막무가내로 욕하는 고객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을 때.
와, 이러다가 숨넘어가겠다, 싶을 때.
나는 조용히 책을 펼친다. 특히 소설책. 상상 속 이야기들이 나의 화를 꾹꾹 눌러준다. 덕분에 내가 14년째 이 회사를 버티고 있다. 아주 탁월한 스트레스 관리 방법이다.
요즘 재미난 영상들이 많은데 왜 책을 읽냐는 질문도 참 많이 받았다. 나는 관찰력이 아주 뛰어나서 영상을 보면 주인공이 무엇을 입었는지 뿐만 아니라 주변 배경까지 싹 기억하려는 습관이 있다.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특히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면 대사까지 외우려고 하는 통에 영화라도 한 편 보고 나면 종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글자만 외우면 되는 책이 좋다. 상상력이 풍부해서 소설을 즐기기에는 아주 충분하다.
나는 장르 불문, 글자가 적힌 책들은 몽땅 읽는다. 속독하는 것도 아니다. 하는 방법도 모른다. 앞표지에 부제목부터 뒤표지에 바코드 숫자까지 아주 책을 발라먹듯이 읽는다.
그렇다고 기억력이 좋은 것도 아니다. 리뷰를 쓰려면 독서 필사는 물론 두세 번 정도는 읽어줘야 리뷰 쓸 자신이 생긴다.
이렇게 쌓인 도서 리뷰가 나를 포털 사이트에 검색되는 인플루언서로 만들어주었다. 그때부터 도서 협찬들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어찌나 행복한지. 이 세상에서 책 선물해 주는 사람이 제일 좋다.
어릴 때는 책 살 돈이 없어서 도서관에서 유행 지난 낡은 책들만 읽었는데 요즘에는 아주 빳빳한 신상 책들을 읽을 수 있어 정말 행복하다.
여러 도서 협찬 중에 웹 소설 협찬도 들어왔다. 웹 소설은 20대 때부터 읽고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다. 나는 보통 자기계발서처럼 집중을 요구하는 책을 읽고 나면 웹 소설처럼 가벼운 책을 읽었다. 이렇게 장르를 번갈아 가면서 읽다 보니 꾸준하게 독서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때 BL이라는 웹 소설 장르를 알게 되었다.
Boy's Love.
보통 같은 장르의 책을 50권 정도 읽으면 어느 정도 그 장르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비슷한 내용의 반복이라는 것도 알 수 있고. 웹 소설도 동일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남주와 여주가 많았다. 10여 년간 로맨스 소설만 읽다 보니 필력이 좋은 작가님들의 작품만 골라 읽게 되었다.
그때 발견한 BL은 나에게 너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BL 안에서도 세세한 장르로 구분되어 있어 골라 읽는 재미가 있었다. 오메가버스물, 가이드물, 수인물 등등.
가끔 웹 소설을 안 좋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만났다.
저 OO 문학상 받은 소설책 읽고 있어요.
하면 대단하다, 멋지다고 하는 반면.
저 웹 소설 읽고 있어요.
하고 말하면. 일단 표정부터가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숨 쉬듯이 수많은 책을 읽고 있는데 이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웹 소설도 일반 소설처럼 정말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다고.
옛날 우리가 가볍게 읽던 인터넷 소설처럼 날아가는 글이 아니라고.
웹 소설도 등장인물들의 감정, 배경 표현 등등이 예술이라고.
BL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 생각은 점점 굳어져 갔다. 책 읽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쓰기란 정말 어렵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기란 더더욱 힘들고.
최근 1년간 읽었던 BL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보통 BL은 19세 미만 구독 불가인 작품이 많은데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자극적인 장면 없이 주인공들이 나누는 감정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 많았다.
그쯤, 나도 소설을 한 번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기록한 지 15년이 된 시점이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감히 작가님의 책을 평가할 수 있어? 어떻게 내가 그 어려운 소설을 쓸 수 있겠어?
글쓰기에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밥 먹듯이 읽다 보니 내 안에 무언가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너무 배불렀다. 쏟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물론 내 상상력을 글로 옮겨적는 일은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아주,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가볍게 초단편 로맨스 소설부터 쓰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글을 쓰면서 어찌나 행복한지, 이젠 스트레스 해소 방법 중 글쓰기도 포함되었다.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글쓰기가 즐거웠다.
그리고 초단편 소설을 완성했을 때의 그 뿌듯함과 성취감은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이 소중했다. 이왕 쓰는 거 누군가가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에 공모전도 참여해 보았다.
어? 그런데 이게 되네?
수상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3등 자리를 차지했다. 심지어 수상한 소설로 숏폼 제작까지. 내 글이 영상화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30여 년을 살면서 처음 느껴본 자신감이었다.
나는 그동안 다른 사람 뒤에 숨어서 조용히 살아왔다. 스스로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작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무료 연재를 하다 보면 나중에 막 출판사에서 컨택도 오고, 출판도 하고, 일러스트 표지도 받고, 팬들도 생기고.
'OO 작가님 작품은 작품 소개 안 보고 무조건 읽습니다.'
이렇게 막 유명해지는 건 아닐까?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Boy's Love.
그렇게 나는 BL을 쓰기 시작했다. 갑자기 BL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다. 그저 많이 읽었고, 뱉어내고 싶었을 뿐이다.
BL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정말 몰랐다.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과연 지금의 '나'는 위에 줄줄이 나열한 꿈을 한 개라도 이루었을까?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