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글을 써본다.
정확히는 계속 머릿속에서 끄적이던 걸 오랜만에 글로 옮겨본다.
나는 올해 초에 군입대를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 삶은 완전히 다른 양식을 취득했다.
혼자서 산책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새벽에 골목을 거닐며 보고 싶은 것도 없으면서 하늘을 바라볼 수 없게 됐다. 애저녁에 닫힌 성장판을 외면하며 일찍 자고 있다.
사람 대하는 것도 많이 바뀌었다. 사회에서 즐겨 쓴 내 처세술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오락가락했지만 여기서는 확실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내 모든 언어와 감정이 받침 없는 세 글자 틀에 잘려나갔다. 그렇게 떨어진 자투리들을 주섬주섬 모으고 있는 요즘이다.
흔히들 군대 가면 철이 든다고 한다. 무언가에 눌리게 되는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 그걸 어깨에 이고 있는 모습이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빌어먹을 무게추 여러 개에 눌리다 보면 시선은 정면으로 고정하게 되고, 현재를 빙자한 다른 모든 걸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지금 당장 어떻게 움직여야 하냐는 고민을 방패삼을 수 있다.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악기와 차로 1시간 반 정도 거리만큼 떨어진 손은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내 일상은 삶에서 잠깐이지만 공개 불가능한 것이 되어 있다. 나를 드러내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말이다.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예술은 간직한 아름다움을 절대 허투루 선사하지 않는다. 우리 개개인의 값어치를 사랑하는 만큼 과속을 금지한다. 그러니 지금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리는 내 연필은 침팬지의 울음소리와 유사하다. 아직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다. 노트북도 없는 나는 이 글의 문단도 구성하기 힘들었다.
상황을 파악하면 상황이 길을 터준다. 포장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길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 충분히 넓은 연병장에서 네비를 켜고 있나 보다. 도착지는 없다. 목적지도 있는지 모르겠다.
18개월짜리 군장을 고쳐 메고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
할 수 없는 것들과 하면 안 되는 것들을 막 섞어놓은 국그릇에서, 작은 숟가락으로 뭘 건져낼 수 있을까.
마음과 마음의 공백의 크기는 구분되지 않기 시작했다. 돌고 돌아 이야기를 짜고 싶었고, 그 이야기들의 자궁은 지금의 나였다. 대리모는 자궁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지금 떠오르는 모든 단어들은 상념에 머무른다. 무언가에 젖어봤자 나는 예전부터 내 이야기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걱정은 역시 기우일리 없다.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감성적이고 싶지 않았다. 애수에 빠지려면 처음부터 그랬지, 애써 무시하는 옆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뿌듯하다. 나는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라서 스트립쇼 스테이지를 떠날 수 없다. 관객은 원래 없었다. 조명에 눈을 못 떼는 것뿐이다.
군인은 자세한 군생활을 묘사하면 안 된다. 그 군생활 안에는 내 감정과 이야기가 너무 많이 담겨있다. 나와 내 자아는 안개벽을 사이에 두게 됐다.
그 안개벽을 뚫어보고 싶었고, 그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찾기 위해 이 국방색 표지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써놓고 휴가를 나왔을 때 수정해서 올리는 건 확답을 바랄 수 없을 것 같다. 사계절 매일 눕는 똑같은 군대 매트리스처럼 먼지를 뒤집어쓸 것 같다.
에세이를 쓰자니 군사보안에 저촉되고, 일렁이는 안개로만 맹글자니 뚜껑을 열면 덧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를 써봤다. 지금까지 읽은 시집이 여덟 권도 안 되지만 시상 비슷한 것들을 한 번 완성 지어보고 싶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계속 쓰다 보니 익숙해졌고, 나름 내 시를 괜찮게 여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군생활을 자세히 묘사할 수 없었고, 나를 둘러싼 환경을 사랑하는 것이 워낙 어려웠던지라, 내 시들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아이들 밖에 나오지 않았다.
좋게 말해 추상적인 거지, 묘사가 부족한, 생생하지 않은 시들이었다.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완성된 시들을 담았다.
안갯속에서
안개 너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