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옥을 가본 적은 없다. 갈 용기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지옥을 가지 못한다. 그래도 확실한 건, 지옥에도 분명 아침이 있을 거란 거다. 눈물 나는 불쾌함을 청각 삼아 알람 소리에 피곤한 몸을 집어던지는, 그런 아침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옥은 사방이 시계로 둘러싸였고, 움직이지 않는 시침과 분침들이 소리를 지르는 곳일지도. 영원히 평일 아침의 순간만 느끼는 거다. 그 정도면 충분히 그곳을 지옥이라고 부르겠다.
월요병이란 단어는 잘못됐다. 이 고통은 병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는 것 같다, 진짜로. 주마다 한 번 죽는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지 않을까. 그래도 출근해야지. 알람이 필요 없는 삶을 나는 받지 못했으니까.
무거웠으면 하는 이불을 집어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가벼웠으면 하는 몸은 너무 무거웠다. 똑같은 그림이 보였다. 터벅터벅 씻으러 화장실로 갔고, 거울을 봤다. 지저분하다. 역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는 출근할 수 없다. 그렇게 겨우 씻고, 뭐라도 먹은 척을 하고, 지하철에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이어폰도 못 끼겠지. 정신도 의미도 없으니까. 못 듣고 안 들리니까. 그렇게 회사에 도착하면 내 자리에 쌓이겠지. 어떻게 얻은 내 자리인데, 꽉 낄 수밖에 없겠지. 지독한 쳇바퀴를 걷어차며 굴려야 한다.
오늘도 예외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낯선 감각을 느꼈다. 화장실로 가다가 뭐를 걷어찼다. 근데 아프지가 않았다. 우리 집에 말랑말랑한 거라곤 배게뿐인데, 그 베개도 오래 써서 뭉개진 체인데. 아래를 보니 왔다 갔다 뭐가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움직이는 건 나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숨이 없으니까.
그러니 저 꼼지락거리는 건 다른 생물이다. 쥐였다. 나는 쥐를 냅두고 집안을 둘러봤다. 마땅히 잡을 만한 도구도 대책도 없었다. 상황이 파악되자 스트레스가 머리를 꿰뚫기 시작했다. 익숙한 감각이다. 천둥처럼 뒤늦게 온 짜증은 시간을 향했다. 잡을 용기는 생기지 않지만 잡아야 한다. 눈을 질끈 감고 쓰레기통을 비웠다. 쥐를 통으로 가두고 비닐봉지로 통을 감쌌다.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안 씻고 출근할 수는 없겠네. 놈은 활발했다. 통통거리는 소리가 비닐 안에 갇혀 작게 울려 퍼졌다.
2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언제나처럼. 오늘도 그랬지만 힘이 났다. 집에 침투한 흉물을 처리하고 싶다. 있는 힘없는 힘 끌어모은 에너지를 쓰고, 누워버리고 싶다. 빨리 밤을 없애야 한다. 그래야 하루가 끝난다. 쉬지 못하는 건 일상이니까 그게 더 좋은 일이다.
눈을 부릅뜨고 봉지 채로 쓰레기통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내쫓기만 하면 되겠지. 행여 돌아오지는 않겠지. 덜덜 떠는 손가락으로 묶은 봉지를 풀어 안을 확인해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없었다. 순간, 힘을 전부 소진했고, 내일 쓸 기력을 끌어야 했다. 방으로 돌아와 패잔병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대청소를 시작했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독립 후에 처음 느꼈던 외로움이 소용돌이쳤고, 소름 돋았다. 알고 있었다. 봉지에 뚫린 구멍은 없었으니까. 어디 갔지? 어디든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어디 갔지?
생각이 끊어졌다. 이제 진짜 한계다. 내 체력 대출의 상한은 여기까지다. 그냥 양치하고 드러누웠다. 오늘 끝낸 pt 결과가 내일 나올 것이다. 말로는 잘했다고 했지만, 한 입으로 다섯 말은 하는 놈들이니. 나라도 우직하게 한 번에 끝내야겠다. 몰라, 됐어.
3
일주일이 지났다. 잘 끝냈다던 pt는 수정 요청이 대거 몰려왔고, 쥐는 매일 아침마다 나왔다. 눈을 뜨고 천장을 본 후, 바로 바닥을 보면 항상 꾸물꾸물 거리는 불쾌한 털뭉치가 있었다. 나는 노력했다. 일찍 일어나서 바로 밖에다 처리해보기도 했고, 세스코 솔루션도 받았지만 전부 의미 없었다. 세스코 직원은 숨어있는 쥐도, 쥐가 비집고 나올 공간도 없다 그랬고, 이 말을 빌미로 집주인도 으름장을 놨다. 어쩌면 그 빌어먹을 쥐는 같은 놈이 아닐까? 내가 계속 살려 보내주니까 우스운 줄 아는 거 아닐까. 다음번에 만나면 맨손으로 졸라 죽여야 할까.
집에서 차로 40분 정도 떨어진 모텔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쥐의 형상을 그려봤다. 수북하다고 하긴 애매하지만 그래도 빼곡한 털로 뒤덮인 몸뚱이, 뻔뻔한 태도만큼 긴 꼬리, 대책 없이 태연한 눈알들. 생긴 대로 생긴 그놈의 요소 하나하나가 내 머리통을 쑤시는 것 같았다. 아니면 쥐니까, 부지런히 갉아먹고 있는 것이려나.
여기는 내 집도 아니니, 쥐가 나와도 상관이 없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샤워도 하지 않고 체크아웃할 거다. 잠을 무리하게 참았던 적도 있었지만, 찢어 죽일 털뭉치는 내가 아주 잠깐 눈을 감았을 때를 놓치지 않고 기어 나왔다. 볼 일이 있어 잠깐 올라오겠다는 부모님은 계속 그랬던 것처럼 바쁘다는 이유로 만류했다. 뭐 사실이잖아! 내 일 바쁜 것도 맞고, 쥐새끼 한 마린지 한 가군지 때문에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내가 무슨 틀린 말을 했어.
4
구부정한 마음 때문에 찌뿌둥하게 깼다. 최악의 주말임에 틀림없다. 쥐가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그걸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시 확인했고, 녀석은 이번엔 방바닥 정중앙에서 자고 있었다. 다가가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놈은 살아있다. 나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자고 있는 것이다.
이제 확실해졌다. 저 놈은 내 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있는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어제 다짐한 대로 신경 쓰지 않고 체크 아웃하고 집에 돌아왔다. 샤워를 하며 생각했다. 나중에 저 모텔의 평가란에 쥐가 나온다는 불만이 달리지는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그만뒀다. 나는 이제 다시는 그곳을 가지 않을 거니까. 무관하다. 그래 무관하다. 그런 일이 터진 모텔 주인장의 억울한 표정은 짐작하지 않는다. 쓸모없이 공간만 차지하게 된 쥐약 박스를 방구석에 밀어버리고 밀린 잠을 청했다.
5
시끌벅적한 공기. 적당히 어두운 조명. 그럭저럭 봐줄만한 가격.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도 배경에 합류했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냐."
"웬일이냐, 바쁘다고 죽상인 놈이 먼저 술 얘기를 하고."
적당한 관계인 사람들이다.
"오랜만이다, 얘들아."
"무슨 일 있냐? 헤어졌어?"
순간 움찔했다. 얘네는 내가 여자 만나고 있는 걸 알고 있는 놈들이었지. 적당한 관계가 아니었다. 실수한 걸지도.
"에이, 아니야."
"그럼 직전인가 보네."
"요즘 어떻게 지내는데? 너랑 그 사람 둘 다."
피곤하다.
"야! 오랜만에 얼굴 보자마자 지랄이야. 다 똑같지 뭐. 바빠서 서로 연락 뜸한 거 가지고 그래."
"시간이든 뭐든 다 나는 게 아니라 내는 거여."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경서가 만족했는지 자작하고 술잔을 들이켰다. 예전 방식대로 넘어가면서 인정해 줬다.
"구체적으로, 새끼야. 일 바쁜 거야 양복 입고 다니는 놈들 얘기는 됐고, 음악 말이야 인마."
기타 강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도윤이 옛날 향기를 자극했다.
"언제 적 얘기를 하냐. 음악 들을 시간도 없는데, 할 시간이 어딨다고."
"개 같은 놈이, 너 때문에 내가 아직도 줄 튕기기고 있는 건데. 무책임한 새끼."
"니는 처음 줄 튕긴 것부터 노래를 못 불러서 튕긴 거잖아. 지금도 못 부르니까 계속 튕기고 있지. ㅋㅋㅋ"
우리는 옛날이야기를 꽃피웠다. 대학시절, 인원이 딸려서 드러머도 없이 밴드를 만든 일, 대학교 수업에 지각해서 뛰어가다, 메고 있던 키보드로 교수님 머리를 부딪힌 일, 돈 없어서 노래방에서 합주하다 사장님이 차라리 한 곡 들려달라 그랬고, 들려줬더니 너무 못한다고, 연습 더 하라고 두 시간 넣어줬던 일.
그때는 참 재밌었다. 허황되지만 창창한 미래를 꿈꿨던 우리에게 사실 미래는 없었기 때문이다. 셋 모두 진지하게 음악에 한 목숨 바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당시 우리 딴에는 할 수 있는 가장 멋있고 구차한 것이 음악이었고, 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각자 가기로 한 곳을 향한 것뿐이다. 도윤이는 길이 없어서 다시 기타를 잡았다. 나는 길이 있어서 억지로 걸었고, 경서도 똑같았다. 나보다 표정이 조금 좋을 뿐이다.
우리는 소주잔을 등산객들의 지팡이 삼아 10년도 안 된 과거를 되짚었다. 우리가 뛰놀던 싸구려 무대와 더 싸구려였던 전선들이 떠올랐고, 그 전선은 쭉 이어지더니 쥐새끼의 엉덩이로 향했다.
취기가 오른 나는 놈들에게 집에서 자고 가라고 말했다. 녀석들은 환호했다. 도윤은 바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경서는 절대 안 들여보내주던 너가 웬일이라며 취한 줄 알고 술값을 내달라고 진상을 부렸다. 흔쾌히 결제하고 안내했다. 쥐공장으로.
6
녀석들은 빨리 자고 싶어 했다. 술을 너무 많이 먹은 것도, 서른을 넘기며 철야가 버거워진 것 때문도 아니었다.
"야 이 새끼, 오늘 말 왤케 많아! 헤어진 거 맞지 이 새끼야!"
"안 그러던 놈이 이러니까 더 웃기네."
방화벽이 고장 난 백화점이 된 것 같았다. 연기처럼 뿜어 나오는 이야기를 차단할 수 없었다. 온갖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젊었을 때 정말 멋있었구나! 내가 지금 개고생 하는 게 그냥 삶에 치인 게 아니었구나! 무언가 잃어버린 게 아닐꺼야!
그리고 장난기 고약한 이 놈들이라면 쥐 한 마리 정도는 거뜬히 혼쭐을 내줄 것이다. 걱정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 역시 자기가 무섭다.
술을 계속 따랐고, 말을 계속 뱉었다. 두 놈은 졸기 시작했고, 어떻게 이 놈들을 깨워야 할까 고민하다 나도 잠에 들었다.
7
눈이 떠졌다. 출근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렀다.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신음 소리를 내는 친구들을 굴려가며 방바닥을 훑었다.
"야, 왜 벌써 깨워! 일정 있냐?"
너무 세게 굴려 벽에 머리를 살짝 박은 경서는 시간을 확인하고 경악해서 소리 질렀다.
감격스럽다. 쥐가 없다.
"어 미안해, 까먹고 있었어."
"미친놈, 그럼 어제 적당히 먹었어야지."
욕하는 도윤을 재촉하며 겉옷을 둘렀다.
"대신 해장국 사줄 테니까 일어나자."
안 나왔어! 개 같은 설치류가 안 나왔다고! 같이 자고 일어나면 안 나오나 봐!
"지은이 만나는 날이냐?"
경서는 정상참작을 하듯 표정을 풀며 물어봤다.
8
적막한 분위기를 어루만지는 나른한 피아노 소리는 조롱처럼 들렸다. 맹세컨대, 이 분위기도, 경쾌하려고 안간힘 쓰는 피아노 소리도 전혀 조롱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게, 맞은편 상대를 진실되게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락 안 한 지 한 달 넘었나, 직전이었나. 지은은 팔짱을 끼고 머그컵에서 올라오는 수증기를 자비 없이 꿰뚫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빠서 연락이 뜸하던 차에 쥐새끼 문제 때문에 신경을 못 써줬다. 사과를 하는 자리다.
"미안해, 지은아. 내가 요즘 너무 정신이 없었어. 앞으로는 신경 쓸게."
지은의 팔짱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연사 하던 시선이 잠깐 아메리카노를 부시고 다시 나를 겨냥할 뿐이었다.
"너만 회사 다녀? 나도 매일 야근해. 너랑 나랑 뭐가 다르길래 나는 기다리기만 하는 거야?"
타당한 이야기는 아프다. 듣는 사람이 타당하게 처세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나도 거기에 해당될 거고.
"요즘 회사 일이 꼬여서 상황이 많이 안 좋았어. 미안해. 할 말이 없다."
사실이다. 그러니 나는 타당함에 다가가고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쥐새끼 때문에 업무 실수가 잦아졌고, 퇴근 시간이 늦어졌고, 쥐새끼를 기다리는 시간만 깊어졌다.
"너랑 못한 얘기가 많아.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말로 하지 마."
난감하다.
"녹턴."
녹턴? 우리가 아는 그 녹턴?
"몇 번이든 상관없어. 오랜만에 들려줘봐. 그거로 꼬셨으니까, 그거로 붙잡아보라고."
피아노 안 친 지 몇 년은 됐는데, 갑자기 칠 수 있을까? 마지막에는 밴드 하느라 클래식은 더 예전인데.
지은의 눈은 어떤 낭만도 품지 않았다. 정말 노래 한 곡을 지표로 쓰려고 하는 것 같았다. 지금 내 연주를 들으며 그때 그 시절과 저울질을 하지 않을까. 내 예전 모습으로 내 지금 모습을 무마할 기회를 준 것이다.
9
지은은 용서해 줬다. 지금의 내게 쇼팽은 무리였다. 먼지 쌓인 키보드는 작동하지 않았다. 지은은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찾은 악보를 보더니 깔깔 웃었다. 악필로 표시된 메모는 엉망진창이었다. 독학으로 시작한 음악, 음악 용어도 모르고 목적도 참 뻔했다. '제발 실수하지 마', '개같이 어렵다', '눈빛교환 타이밍, 외워야 함'. 시간이 참 많아 보이는, 치기 어린 노트들을 보고 지은은 감정을 풀어줬다.
그렇게 우린 서로의 고충을 나눴다. 쥐새끼한테 고마워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읽은 오선보는 어지러웠지만 멋있었고, 지은도 그랬다. 아침에 조심스럽게 일어나 바닥을 확인했다. 가설이 맞았다. 쥐는 없었다. 더 자고 싶어졌다.
10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다른 의미로 말이다. 인간관계를 다시 가꾸기 시작했다. 경수, 도윤이 같은 옛 친구들에게 연락을 걸었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보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모르는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휴대폰 알람처럼 불어난 자신감은 회사 업무에도 영향을 줬다. 말을 분명하게 하니 오해도 줄었고, 업무 분장도 명확해져 어이없게 야근하는 일이 줄었다.
대신 쥐는 점점 더 무서워졌다. 누굴 재우거나, 내가 가서 자지 못한 밤은 다음날 항상 쥐가 나왔다. 어차피 처리해도 계속 나오고, 어느 순간 사라져 있으니 그냥 냅두기로 했다. 그래도 불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패배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등한 생물 하나 때문에 내 편안함이 위협받는 건 괴롭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만, 피하는 모양새는 영락없는 줄행랑이니까.
부모님이 또 연락을 보내셨다. 이번 달은 시간이 나냐고 말이다. 나지 않았다. 이번 달 주말은 모두 동창회, 동호회, 지은이로 꽉 찼다. 이번에도 바빠서 죄송하다고 말했고, 이번에도 난 거짓말 한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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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은 어떤 곳인가. 옥탑방에서는 간절함을, 멀티플렉스에서는 여행지에 도착한 것 같은 착각을, 산 정상에서는 원초적인 자유를 느끼게 해 준다. 우리 회사 옥상은 고속도로 졸음쉼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옛날 해적들이 판때기 위로 사람을 밀었던 풍경이 떠올랐다. 나는 중심을 잡는 위태로운 입장이었다.
"요즘 왜 그러냐. 잘 좀 하자. 술 작작 먹고."
과장님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나직이 말하고는 내려갔다. 최근에 넘긴 결산에서 오탈자가 났다. 몇몇 하청 회사에 송금이 잘못됐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그 회사들을 전전하며 사과드리고 돈을 회수해야 했다.
요즘 정신이 몽롱하다. 사람들 만나느라 시간도 돈도 부족하다. 술 없이 사람들을 재우거나 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기회만 생기면 뺀질나게 왔다 갔다 하던 유년기가 그립다. 그때는 서로 숨기는 것도 숨길 것도 없었으니. 굳어버린 어른들을 무장해체 하려면 술 밖에 답이 안 선다. 미쳐버리겠네. 그렇다고 회사에서 잘 수도 없고. 요즘은 쥐 그림만 봐도 급성 저혈압마냥 머리가 핑 돈다. 어느새부턴가, 커피보다 숙취 해소제를 더 많이 마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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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요즘 왜 그러냐. 철이 일찍 들어서 싫었는데, 대학생 때보다 더 놀고 자빠지면 어떡하냐? 평소에 연락을 자주 했던 것도 아니고, 갑자기 왜 그래? 너 돈 필요하냐?"
경서
"니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나는 솔직히 실망이다. 비록 하루살이처럼 벌어먹고 살고 있지만, 나는 아직 음악 포기 못했다. 저번에 너 때문에 음악 시작했다는 것도 진심인데. 이젠 생각 안 할란다. 내가 뭐 딴따라 하래? 시간이, 에너지가 남으면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지. 술 처먹고 안 좋은 소문이나 얻고, 이게 뭐냐 인마? 너 성격대로 집에서 혼자 키보드 누르고 쉬어. 생긴 대로 안 살면 탈 난다.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고생해라."
도윤
"안녕하십니까, 서울 직장인 미식 동호회 회장 김가은입니다. 불편한 얘기 꺼내게 되어 죄송스럽지만, 다음 달부터 저희 동호회에 나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여성회원들이 안 좋게 보셔요. 자꾸 집에 부르거나 가려고 하시는 모습이 좀 그래요... 물론 직접적으로 여성 분들께 그런 것도 아니고 만나는 사람도 있는 거 알지만, 분위기가 이상해져서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회원들끼리 합의한 결과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어느 회장 여자
"이 여자에 미친 새끼가, 나오지 마라"
또 다른 회장 새끼
"예, 서울 직장인 와인 동호회 회장 최수민입니다. 지난 몇 달간 회비 입금이 되어 있지 않아 연락드렸습니다. 이런 말씀드리긴 뭐 하지만 제일 많이 나오고 많이 드시는 분이 그러니까 얘기가 나와서요. 내역 확인 부탁드립니다."
죄송스러운 술 모임 회장님
"믿은 내가 바보지. 너는 나랑 자려고 만나냐? 연락하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
너무 짧은 지은
이외 여러 통화들. 전부 대답하지 못했다.
전화를 걸었다.
"예, 어머니. 겨우 시간이 비었어요. 좀 지나갔나 봐요. 이번 달 시간 괜찮으실 때 연락 주세요. 아버지한테도 전해주세요."
13
오랜만에 들른 아들의 방은 더러웠다. 아들이 이렇게 느꼈으니, 부모들은 오죽하겠나.
"집 꼴이 이게 뭐냐."
"에휴 어쩐지 와보고 싶더라니."
"너 여자랑 헤어졌냐? 아니면 걔가 신경을 너무 안 써준다."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인생에 하등 쓸모는 없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필수적이라고 느껴지는 초등학교 시험지를 숨겼다 걸린 느낌이었다. 다 똑같은 건데 결국. 전부 쓸모없고, 필수적인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예, 헤어졌습니다. 서로 바빠서 소원해졌어요."
나는 계속 추궁당하느니 그냥 자수했다. 예정된 세례가 시작될 것이다.
"하이고, 인마! 오래 만난 애랑 잘 됐어야지. 직장도 좋은 데 다녔다며?"
"걔 애가 되게 괜찮았는데... 요즘 관심 있는 사람은 있어? 없으면 말해. 주변에 많아."
부모님들은 인맥이 참 훌륭한가 보다. 주변에 뭐 그리 나이 별로 다 있어. 나도 나이 먹으면 저렇게 되려나.
어머니가 해주신 고기반찬들과 배달한 회를 먹었다. 아버지는 소주잔을 찾으시고는 소주를 못 찾으셔서 왜 없냐고 하셨다.
예정된 추궁은 언제나 예정보다 일찍 끝난다. 듣는 사람, 시간 아니 둘 다, 끝까지 못 버티기 때문이다.
"만나는 여자 없으면 우리 자고 가도 되지? 별로 안 좁아서 다행이다."
"정리 좀 하고 살자. 웬 쥐약이 이리 많아? 쥐 나오니?"
"아뇨. 저번에 살던 데서 종종 나왔어요. 이사 올 때 아까워서 챙긴 거예요. 여긴 안 나와요."
최근까지 가장 미웠던 생물을 변호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간절하다. 더 이상 남은 사람이 없다. 잠자리를 뒤척이다 어머니의 걱정을 흔들었다. 그게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자는 줄도 모르고 잠에 들었다.
14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쥐가 생긴 후로 집에 누굴 재우고 늦게 일어난 적이 없었는데, 역시 어머니는 막강하다. 이 중요한 날에도 패배했다.
"일어났니, 밥 먹어라."
"쥐 없다며, 아까 나와서 깜짝 놀랐네."
하달된 아침을 먹으러 일어나다가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쥐가 나왔다고?
"술 덜 깼니?"
쥐가 나왔어. 왜. 대체 왜.
"아버지, 나왔다던 쥐. 어떻게 하셨어요?"
아버지 양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왜 이래, 죽여서 버렸지."
나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여러 통의 믿을 수 없는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더 큰 상실감을 느꼈다.
아니야. 잡지 못했어. 그렇지 않아. 잡지 못했어.
"혼자 뭐라 중얼중얼거리는 거냐."
"급한 일정이 있어서 지금 나가셔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빌었다.
"웬 일정? 그리고 일정이랑 집 비우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차표도 아직 안 끊었는데."
"그래. 출근해야 되면 한 숟갈만 뜨고 나가. 방 정리 하고 알아서 갈게."
숨이 찼다.
"아니에요. 지금 진짜 급해요. 빨리 짐 챙겨주세요!"
역시 나의 부모님들이다. 말이 안 통하는 상황이라고 깨달으셨다. 역시 나다. 부모님의 익숙한 실망의 얼굴을 드리웠다.
"아들, 연락해!"
아버지는 혀를 차며 짐을 들고 먼저 나갔고, 어머니는 화난 것만 숨기면 이해한 것처럼 보일 거라고 착각하시나 보다. 그럴 수는 없지.
혼자가 된 방에서 정적이 흘렀다. 누웠다.
15
일어났다. 오랜만에 천장을 지긋이 바라봤다. 계속 일어나자마자 바닥만 봤더니, 천장이 바닥 같았다. 그렇게 치면 우리 집은 살림살이가 전혀 없구나. 사람 사는 곳 같지 않구나.
바닥을 봤다. 쥐새끼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집을 나서 코스트코로 갔다. 거기서 검은색 햄스터 케이지를 샀다. 바닥 정중앙에 케이스를 놓고, 처음으로 맨 손으로 쥐를 잡았다. 쥐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숨만 쉬었다. 쥐를 케이지에 넣고 다시 잠에 들었다. 불안과의 싸움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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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자서 다음날이 되었다. 케이지를 봤지만 쥐 한 마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혼자 일어난 내 방에 쥐는 나타나지 않았다. 출퇴근 길에 다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들어본 노래가 나왔다. 화면을 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기억해 보려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