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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May 11. 2024

흡연실을 전전하다

일곱 번째 이야기


1


하얀 것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오고 간 이들이 쌓은 인기척으로 끈적끈적한, 검은 벽과 부딪혔다. 뛰어오는 아이를 피하는 비둘기 떼처럼, 하얀 것은 모여있기를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또 하얀 것이 올라갔다. 이번엔 질서 정연하고 빠르게 원뿔을 만들며 전진했다. 그 추진력에도 검은 벽은 이정표였다. 하얀 것들이 흩어지는 모습은 전등 밑에서 일렁였다. 일사불란하게 헤어지는 그들의 조금 위쪽은 만남의 공간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돌아가지 않는, 먼지로 노래진 환풍구에 정오를 갓 넘은 햇빛이 들어왔다. 하얀 것들은 그 회전문이었던 다섯 문을 지나 마구잡이로 더 위를 향했다.


그렇게 하얀 것들이 차례로 여행 절차를 밟고 있을 때, 반대로 내려가는 하얀 것들도 있었다. 빨간 따뜻함을 중심으로 하나였던 이들은, 신호에 맞춰 아래로 떨어졌다. 몇몇은 무리에서 벗어나 자기 갈길을 찾았다. 대부분은 목적지였던 물 웅덩이에 착륙했다.


하얀 것들도 차례로 여행을 떠나고 있을 때, 미지막까지 남은 하얀 것이 웅덩이에 머리를 갖다 댔다. 재로 덮어 숨어있던 빨간 따뜻함이 축 늘어졌다. 마지막 하얀 것의 남은 다리까지 웅덩이로 조금씩 가라앉았다.


어느 카페 2층에 있는 낡은 흡연실 안에 남자가 한 명 앉아 있다. 남자는 적당히 광 나는 검은 벽에 비칠락 말락 하는 자기 모습을 찾다 관뒀다.


남자는 하얀 것을 새로 꺼내 그 녀석의 머리에 불을 붙였다.


2


투명한 침이 하얀색이 됐다. 슬슬 목이 말라오고, 혀에도 불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담배를 그만 피우라는 신호는 곧 줄담배의 시작을 의미한다. 지금 많이 피워둬야 한다. 이 카페는 넓은 흡연실로 흡연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얼마 안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기 시작할 것이다.


내 맘대로 쉼터를 전세내고 있을 때, 역시나 그 여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흡연실 구석으로 가 쭈그려 앉아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며 출근도장을 찍은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휴대폰을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이 카페에 오는 날에는 시각을 불문하고 항상 먼저 와 있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추정되는 그녀는 자리에서 화난 목소리로 통화하는 일이 잦았다. 그녀는 줄담배의 대가다. 보통 나보다 먼저 흡연실에 들어와 있던 그녀를 이기려고 연달아 피워봤지만, 항상 낯간지러워져 더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그게 줄담배의 자질이다. 건강한 폐보다 뻔뻔한 몰입으로 개피 수를 잊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굳이 1층 구석에 자리를 잡는 건 의문이다. 그렇게 담배를 많이, 자주 피우는 사람이 흡연실이 있는 2층 구석자리는 왜 구석으로 치지 않는 것일까. 직장과 집은 최소한의 거리가 필요한 법. 너무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출퇴근 길일까.


딱 한 대만 더 피우고 이 흡연실을 떠야겠다. 흡연자들끼리는 분명 내적 친밀감이 존재한다. 나는 그것 때문에 서로 눈치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런 유대감을 가지고 완전한 타인의 벽을 유지하는 것은 괜히 복잡한 일이다.

 

실내흡연의 가장 큰 장점은 바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연기는 멋대로 부서지듯 흩어지지 않는다. 함부로 방향을 틀어 나침반 역할을 하지 않는다. 뱉은 연기는 시선의 흐름과 같은 속도로 허공을 탐지한다. 불붙은 담배에서 순응하듯 올라가는 독한 연기는 손의 미세한 움직임에 맞춰 지그재그로 꺾인다.


흡연실의 차분한 조명은 유실되는 연기를 눈에 담아준다. 그러니 내가 담배를 피우며 조금씩 하얀 연기로 채색하는 건 나와 다른 흡연자들 사이에 있는 칸막이고, 불타버린 3분에서 5분 남짓한 자투리 시간이다.


내리꽂은 꽁초가 재떨이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의 메아리를 찾으며 잠시 멍을 때리다 흡연실을 나왔다. 나는 오늘도 그녀에게 패한 것은 아니다. 오늘은 음료를 사지 않았다. 이용권이 없는 내가 머무른 1시간은 흡연 세계의 호의였다. 떠도는 사람에게 밥까지 먹여줬으니 슬슬 안방에서 나올 때가 됐다.


3


흡연 부스는 자고로 점박이어야 한다. 깔끔한 단면들로 사방을 감싸는, 모더니즘이 덕지덕지 붙은 흡연실에는 나 혼자뿐이다. 벽면에 수많은 구멍이 있는 낡은 흡연 부스에 햇빛이 들면, 각도에 맞게 여러 막대기가 생긴다. 머금고 있던 담배연기를 점박이 벽에 힘껏 뱉으면, 비로소 그 친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따뜻한 창살 같기도 하고, 자상한 총알 행진 같기도 하다. 그렇게 억지로 끌어내린 빛무리는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진다. 그러니 다시 내뱉는다. 햇빛 각도가 달라지면 일부러 몸을 숙이거나 까치발을 들어 비스듬히 누워있는 하얀 기둥들을 다시 불러내곤 했다.


구름이 움직이다 말아 자리를 떴다. 거닐다 눈에 들어온 번화가의 좁은 골목은 한낮에도 어두웠다. 거기서 흡연을 할 수는 없었다. 학창 시절 이런 좁은 골목을 막는 담배연기를 나는 뚫을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 좁은 골목을 하얀 벽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남아있는 담배냄새를 흔들며 좁은 골목을 지나니 노래방이 하나 있었다. 입구 맞은편에 실내 흡연실이 있었다. 이번에도 새로운 재떨이와 인사했다. 카운터 직원과 유리벽으로 교신할 수 있는 곳은 오래 있을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많아봤자 두 개비라고 생각했다. 불을 붙이고 몇 모금 마셨을 즈음,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대여섯 명 여자애들 무리가 노래방으로 들어왔다. 걔네가 어린 나이에 흡연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설령 흡연을 하는 아이들이더라도 나는 확실히 그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 졌다.  재떨이에게 고개 숙인 담배는 하나로 그쳤다.


4


적당히 불투명한 유리벽을 넘어 울긋불긋 달아오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밝았다. 표정과는 상관없이 컴퓨터 스크린의 빛을 받아서 그렇다. PC방 흡연실 주변에는 흡연자만 앉는다. 그러니 내가 지금 곁눈질하는 사람들을 곧 이 작은 직윤면체 휴게실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유리벽을 게슴츠레 보다 보면 내 얼굴도 보인다. 그러면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담배연기의 동향을 확인하다, 다시 바라보고 그랬다. PC방 흡연실은 편하다. 저 많은 좌석들 중 내 자리가 어디 있는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저 의자들 중 하나에 심신을 의지하지 않아도 분명 내 자리는 저기 어딘가에 있었다.


뒤통수를 보는 게 되려 가장 재밌다. 그가 다루는 모니터 화면은 관심 없다. 그걸로 그 사람 표정을 유추할 수는 있겠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흡연실로 돌아 들어올 때 처음 보는 타인의 진실은 갓 잡아 보는 것이 가장 감질나다. 아마 같은 사람을 두 번째로 보게 될 때쯤 이 자리를 떠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을 이정표로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게 믿을 것이다.


제멋대로 그 사람이 날 알아봐 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나를 괜스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를 가지고 가지를 펼쳤으면 좋겠다. 내가 여기에 게임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까지만 생각해 주면 좋겠다. 역시 제멋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단정 지으니 드디어 내가 깔고 앉은 좌불안석의 가시가 느껴졌다.


5


해가 졌다. 밤이 오고 있다. 내게는 하늘이 담배연기가 더 잘 보이는 도화지로 바뀌었다는 게 유일한 의미였다. 이곳도 어느 골목이다. 아까보다 더 무리 지어 있었다. 바로 앞 건물에는 재즈바가 있다. 좋은 분위기와 음악이 무색하게, 그곳에는 흡연실이 없다. 그러니 바 손님과 곧 손님이 될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골목 자투리에서 뭉쳤다.


도란도란 서로를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그들의 뒤통수는 벽 같았다. 둘이서도 충분히 독립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혼자인 나는 어디를 바라봐도 내 정면을 가릴 수 없었다. 올라가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을 담배 연기만이 내 얼굴을 살짝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그냥 다른 곳을 갈까. 흡연실도 없는 바에 어떻게 돈도 안 내고 앉아 있는단 말인가. 메뉴판을 받고 가격에 깜짝 놀라 도망치는 사람이 종종 있다는데, 나는 그런 부류가 되지 않고는 혼자서 즐길 수 없는 걸까. 사람들이 흡연을 마치고 건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혼자 남는 건 상관없지만 이곳에 혼자 남기는 싫었다.


낑겨서 탄 좁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자동 피아노 선율이 를 맞아줬다. 분명 이곳의 공기는 페달 없는 명량한 피아노 소리일 것이다. 바 구석진 곳에 혼자 앉아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부리나케 컵을 준비하는 직원들의 인사는 받을 수 없었다. 마침 공연이 곧 시작된다 알려줬고, 내가 알기로 공연 관람 10분 전에 퇴실하면 관람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


내가 이곳에서 동냥받은 시간이었다. 담배 없는 10분은 엄청 길게 느껴질 것 같다. 곧 무대 조명이 켜졌고, 뮤지션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재즈 공연의 장점은 자기소개의 부재다. 그들은 자기소개를 언어로 하지 않는다. 첫 곡에서 충분히 자신들을 뽐내고 통성명으로 거친 마감을 할 뿐이다. 그들을 볼 때면 나는 자기 모습을 오롯이 감추고 멍하니 있을 수 있겠다는 위로를 얻는다.

 

내 삶의 궤적은 스네어 드럼이 쪼개줬다. 오늘의 행적은 낮은 베이스 선율이 덮어줬다. 질문하듯 서성거리는 피아노 소리는 지금 내 집중력 마저 따스하게 없애줬다. 마침 색소포니스트의 솔로가 끝났고,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아 내가 오두방정을 떨며 소리를 쳤다.


그때서야 다른 손님들은 자기들 세상에서 삐져나와 박수를 쳤고, 바쁜 직원들은 자기들 세상으로 돌아와 박수를 쳤다. 이때다 싶어 얼굴을 한껏 꾸기고 카운터로 갔다.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최대한 진심 어리게 말해 보았다.


6


어둑해진 밤거리 속 공사현장은 그에게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회색빛 판자를 마주 보며 담배를 피운 그는 분명 자기 낯빛도 회색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뿜은 담배연기가 가로등 빛을 가리며 올라갔다. 그는 연신 연기를 위로 내뿜으며 흘러간 자신의 하루를 생각했다. 그 생각은 역시 담배연기처럼 흩어졌다. 그는 거리를 거닐다 24시간 무인카페를 발견했다. 오늘 처음으로 돈을 쓰고 싶어졌다. 11시 반. 아슬아슬했다.


이런 곳에 처음 온 그는 음료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힘겹게 내린 카페라테는 필수적인 구성품이 몇 개 빠져 있었다. 덜떨어진 음료를 한 움큼에 마셔버린 그는 이제 그만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집 앞 편의점에 가서 비닐을 벗겼다. 12시 5분. 그의 그날 첫 소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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