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주희 Apr 26. 2022

순수한 본능이 주는 두려움

 눈발이 흩날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 교정에 어느새 민들레 홀씨들이 떠다닌다. 마치 여름 같은 사월의 어느 월요일. 4교시 영어 시간이 되자 걷어둔 일기장 바구니를 갖고 회의실로 갔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A4 용지는 한 장애인 기업으로부터 들어온다. 회의실에 가기 위해 계단을 걸어오던 나를 보고 어떤 낯선 분이

 "안녕하세요."

 하고 크게 인사를 했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누구든 인사를 하기 때문에 나도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다시 그쪽에서

 "안녕하세요."

 했다. 눈을 대범하게 마주치며. 그 동공은 지나치게 확장되어 있었고, 목소리도 마치 그 앞에 열 명은 있는 듯 너무 컸다.

 회의실에 갔을 때 A4 용지 박스를 정리하고 있던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며,

 '아, 그 기업에서 일하는 장애가 있는 사람이구나.'

 알게 되었다.




 "저희가요, 영등포에서 왔어요."

 이미 더 대꾸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큰 목소리를 듣고도 모른 척할 수 없어

 "아, 그러시군요. 멀리서 오셨네요."

 라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영등포 구청에서 왔어요."

 역시나 지나치게 큰 목소리, 같은 내용.

 "저희가 펜이 없어서요, 펜 좀 빌려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한결같이 내게 고정되어있는 시선. 나는 조금씩 무서워졌다. 그는 '너의 육체를 원한다' 메시지를  눈을 통해 똑똑히 전하고 있었다. 내게 펜을 빌려갔다, 도로 주었다, 다시 빌려가기를 반복했다. 그의 얼굴뿐만 아니라  있던 몸도 아예 대놓고 내쪽으로 돌린  계속 말을 걸어왔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물리적 거리에 위기감. 여기가 지금 대낮의 학교라는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던 도중 전산실무사님이 그곳에 들어오셨다. 다행히 내 곤란함을 감지하셨는지

 "저한테 말씀하시면 돼요."

 라고 그분만큼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두어 번의 실랑이 끝에서야 그는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도 낮의 회의실에서 있었던 그 일의 찜찜함이 남았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딱 붙는 H라인 스커트가 문제였을까?'

 대학 졸업식 때 입었던 정장 치마를 오랜만에 꺼내 입고 나간 날이었다. 봉제선이 티가 나지 않는 속옷을 입은 걸 아침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광택이 있는 원단이어서 하체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보였을까.


 호리호리한 몸에 유난히 큰 골반이 크게 커브를 이루는 내 몸이 나는 좋다. 쑤욱 쑥 들어갔다 나오는 곳이 있으니 옷을 입으면 여성스럽기 그지없어서다. 키도 큰 편이라 좌우로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내리 꽂힌다. 그도 평소에는 나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제는 특별히 불쾌했다. 사회적 제어가 부재하는, 순수한 한 남자의 욕망을 그대로 직면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모든 남자는 사실 알고 보면 누구든 세상이 부여한 여러 껍질을 벗기고 나면 그와 같은 그릇된 순수함이 존재할 거라는 판단에서 구역질이 났다.

 스스로의 몸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런 몸이 타인에게 불러일으키는 욕망 사이의 간극에 대해 고민해 본다. 내 몸은 내가 가진 보기 좋은 자산이자 가꾸는 대상일 뿐이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반응을 보이는 타인, 특히 남자를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을 열여섯 살도 아닌데 새삼 또 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각 없이 벚꽃을 보고 있자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