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탱고화가 도착했다. 6cm라는 내게는 어마어마한 굽 높이여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갑자기 더 장신이 된 나 때문에 당황해하는 분도 많았다. 어제는 첫날의 수수함을 버리고 허리 부분이 과감히 커팅된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갔다. 여기서는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입고 춤을 출 수 있어 너무 좋다.
그날은 정모 때 같이 초급 수업을 듣는 기수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다들 이제 막 시작한 사람들이다 보니 말이 잘 통했다. 그중 한 분과 다음 주부터 초중급 수업도 등록해서 같이 듣기로 했다. ‘이제 세 번째 왔는데 초중급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도 되지만, 선생님이 할 수 있다 하니 자신감을 가져본다.
탱고는 남자가 여자에게 함께 추기를 요청하고, 여자는 응한다. 그렇기 때문에 추고 싶다고 혼자 스테이지로 걸어 나갈 수는 없다. 물론 회원들 간에 친밀하기 때문에 먼저 말을 꺼내는 여자분도 계시다. 하지만 나는 아직 햇병아리라 누가 춤 신청을 할 때까지 꿀 먹은 벙어리로 앉아 있는다. 춤을 추러 나가서도 아직 몇 개 스텝밖에 밟을 줄 몰라 상대에게 미안할 때가 많다. 그래서 어서어서 배우고 싶다.
어제는 자유롭게 춤을 추는 정모 시간 후에 따로 뒤풀이가 있었다.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었던지라 알레르기약을 먹고 있음에도 따라가서 맥주를 한 잔 했다. 지난주에 ‘이곳엔 이름과 나이를 밝히지 않는다’는 세계관을 심어주신 분이 물었다.
“주희 님은 여름휴가 계획이 어떻게 되세요?”
애써 밀어둔 이별의 슬픔이 갑자기 큰 파도가 되어 떠올랐다.
“아… 저는 사정상 휴가가 취소됐어요.”
울먹하려는 걸 겨우 참았다. 다 큰 어른이 호프집에서 울면 안 된다. 그렇게 대답한 후 왠지 모르겠지만 인스타에서 수업 직전에 본 ‘백년해로의 3가지 비밀‘이라는 피드가 떠올랐다. 부부가 백년해로하려면 근접성 추구, 안전한 피난처, 안전 기지의 단계를 거친다는 이론이었다.
그에게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나에게 그는 안전한 피난처이자 안전 기지가 되어줄 거라 믿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는 “너는 선생님이 되어서 그것도 모르니?”, “교사가 그러는 건 보기 좀 그렇더라”며 ‘인간 나’를 ‘교사로서의 나’로 대입하며 비난했다. 나는 언제부터 그에게 그저 여자친구가 아닌 한 명의 교사였을까 궁금하면서 억울했지만 알 길은 없다. 최근에 다른 자리에서 어떤 분이 나에게 선생님이냐고 대뜸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왠지 미래에 내가 비난받을 기초를 알려주는 것만 같아 쉽게 “네”라는 말이 목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그가 음주 운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거나 목소리가 기어들어갈 것처럼 작은 것, 사람 마음을 저렇게 헤집어놓는 것까지 소름 끼치게 전남편과 비슷하다. 전남편과는 같이 싸우며 상처를 키웠는데, 이번에는 날아오는 창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웃고자 했다. 연애하는 중에 그에게서 전남편과 비슷한 모습이 보일 때면 나도 모르게 흠칫흠칫 했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결혼하지 않고 헤어졌다. 그리고 악착같이 자기 몫을 챙기던 전남편에 비해 전남자친구는 그래도 아무 물건도 다시 달라고 하지 않았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전남편도 이 사람처럼 자존감이 바닥이어서 나에게 그렇게나 화를 심하게 냈던 걸까 싶지만, 그것도 알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어쩌면 나는 이런 사람만 골라서 만나는 신기한 능력이라도 갖고 태어난 건 아닌가 싶다가도, ’ 에이, 그런 게 어딨어.‘라며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켜 본다. 그는 전남편의 조금 진화한 나은 버전같은 사람이었나? 그렇다면 이다음은 그보다 조금 나은, 그렇지만 비슷하기도 한 사람이려나. 그냥 지금은 그런 우울한 생각을 할 겨를 없이 직업도 이름도 없는 안전한 춤의 세계에서 자유를 입고 예쁘게 춤추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