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웃으며 말하면 무슨 부탁이든지 간에 아주 다 들어주겠어."
첫 학교 때 나이 지긋하신 한 여선생님이 회식자리에서 내게 말씀하셨다.
'부탁은 무슨...'
미소를 마치 무기처럼 쓴다는 뜻처럼 들려 그 말이 듣기 싫었다.
"넌 웃을 때 예뻐."
라는 수도 없이 많이 들은 말도 꼭 ‘넌 무표정해선 안 돼.’처럼 들려서 별로였다. 나도 기분 나쁠 때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있고 싶다.
기분이 우울한 상태에서 찾은 미국의 어느 가게에서도 여자 점원이 계산을 해주고 나서
"Your smile looks so beautiful."
이랬던가? 미소에서 빛이 난다고 했던가? 예의상 살짝 올린 입꼬리에도 사람들은 나보다 더 기분 좋아하곤 했다.
며칠 전에는 쓰레기봉투를 사러 집 옆 슈퍼마켓에 들렀다. 33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슈퍼 안은 냉방을 제대로 하지 않아 무척 더웠다. 살 만한 물건이 없어 그냥
"쓰레기봉투 10리터짜리랑 음식물 쓰레기봉투 2리터짜리 열 장씩 주세요."
했을 뿐인데 주인아저씨의 땀 흘린 얼굴 위로 아까는 찾아볼 수 없었던 화사함이 봄꽃처럼 번졌다.
'아, 내 미소가 이 사람을 비추었구나.'
나는 그제야 전남자친구가 말한 '넌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가 이런 것인가 하고 번뜩 깨달았다.
매년 봄부터 여름까지 연례행사처럼 피부 질환을 앓는다. 아토피와 알레르기 사이 무엇인 줄 알았던 이 가려움과 발진이 사실 곰팡이라고 새로 간 병원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그렇게 습하게 지낸 것도 아닌데 발톱도, 접히는 부분도 아닌 다리에 곰팡이라니! 난 정말 저질 면역의 소유자임에 틀림이 없다.
쉽게 피로하고 자주 머리가 아프며 신경을 쓰면 소화가 잘 안 되는 비루한 몸도 나란 사람을 말해주는 특징이다. 그런 내가 사회생활을 하고, 일을 하고, 심지어 부장 업무를 해 내는 데는 아마도 내 햇빛 미소 덕을 톡톡히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불친절한 말과 일부러 그러려는 건 아니지만 생각이 짧아 때로 불쑥 무례해 보일 수 있는 태도도 햇빛 같은 미소 없이는 더 도드라져 보였을 것이다. '어떻게 살았느냐'는 전 남자 친구의 물음에 답을 하자면 나는 이날 이제껏 이렇게 살아남은 셈이다.
다만 나의 웃음 뒤에 숨겨진 차가운 이면을 살면서 조금은 데워놓았다고 할까. 여전한 부분도 많긴 하지만 말이다.
아마 앞으로도 비슷하게 살아가겠지. 핏기 없는 내가 들어 올리는 입꼬리에 사람들은 환하게 화답해 준다. 그 밝아지는 얼굴 하나하나가 다시 나를 밝혀주며 살아갈 것이다. 늘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