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는 나에게

엄마로서도 잘해 갈 수 있을 거란 격려를 보내다

by 이주희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독서모임의 한 회원분이 다양한 직업을 탐구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인데, 일전에 내게 인터뷰 요청을 하셨다. 흔쾌히 승낙을 했고 어제 촬영을 했다. 50분가량, 녹화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인터뷰를 하고 있자니 무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한 번도 교사가 되길 원한 적 없던 내가 교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미주알고주알 이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는 게 너무 역설적이어서 그랬나보다.


지난 토요일 밤 한 와인바에서 준호 오빠와 영주, 나 이렇게 셋이서 2016년 산 텍스트북(Textbook)을 마셨다. 미국 까베르네 쇼비뇽 치고 여리여리한 데다 알콜 향도 강하지 않고, 끝 맛은 살짝 달면서도 깔끔해 마시기에 너무 좋았다. 어둑한 불빛 속에서 준호 오빠가 "그래서 애들은 언제 볼 수 있니?"라고 물었다. 면접 교섭권을 말하는 듯했다.

"사실 막무가내로 찾아가서 데리고 와도 돼."

"그런데 그러면 애들이 혼란스러워할까 봐?"

같은 주제로 예전에 한 번 대화를 나눴던 영주가 거들었다.

"어. 그리고 내가 그렇게 데려오면 남편도 찾아와서 또 그렇게 데리고 갈 수도 있고. 그러면 애들이 힘들어질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소송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간 상담사 분이 비슷한 내용으로 당부하던 말을 다시 기억해냈다. 혹시라도 우연히 아이들과 길에서 마주친다면 아마 크게 울면서 떨어지지 않으려 할 거라고.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헤어지게 되면 굉장히 애들에게 안 좋을 거라고. 차라리 차분한 상태에서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하는 내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혹시라도 막무가내로 아이들을 데려오는 게 정답은 아닐까, 끊임없이 회의가 들기 때문이었다. 작년 가을 아이들이 시댁 근처에서 다니기 시작한 어린이집을 처음 아이사랑 포털을 통해 알게 되었을 때, 당장 보러 내려갈까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역시 가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결론을 내리며 나 자신을 타일렀다. 예매해둔 기차표와 조퇴 신청을 철회했다. 그래도 이렇게 그리움을 꾹꾹 참는 게 정말 맞는 건가 때로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래서 두렵다.

그 설명을 마치자 마음속에 '엄마로서 앞으로 잘해나갈 수 있을까?'란 물음이 덩그러니 남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두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을까, 혼자서. 내 앞가림도 때로는 답답할 정도로 잘 못해서 주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한번도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로 다시 돌아와본다. 교사가 되길 원해서 교대에 간 게 아니었기 때문에 방황했었다. 학점은 늘 바닥이었다. 그러다 첫 교생실습에서 6학년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어렴풋이 사명감 같은 걸 느꼈다. 그리고 나서 학교로 돌아온 뒤로부터는 열심히 수업에 참여했다. 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물구나무서기 같은 기이한 체육 실습도 묵묵히 따라 했다. 그리고 오늘의 내가 되었다. 크고 작은 풍파가 있었지만 여전히 내 일에 자부심이 있는 중견 교사로 성장했다. 그와 아주 큰 관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서울시 교육감 표창도 한 번 받으며.

그에 비하자면 아이들은 임신이 잘 안되어 세 차례의 인공 수정과 두 차례의 시험관 시술 끝에 어렵게 세상에 나왔다. 처음부터 내가 원해 일어난 일이었다. 이미 과다한 세계 인구에다 사람 수를 더하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내가, 나와 달리 ‘태어난 것을 원망하지 않는 삶’을 선사해주겠다는 각오를 했다. 자궁경부에 이형 세포가 발견되어 간단한 수술을 하면서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없는 채 죽게될까 걱정이 되어 시작한 여정이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남편은 곧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면 정리될 것이다. 앞으로 두 딸을 키우며 겪을 험난함이나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는 능력과는 별개로 그 아이들은 오롯이 나의 책임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정말 둘을 잘 키울 능력이 있는지는 가끔 물음표가 되어 머릿속에 쑥 떠오르곤 한다. 그럭저럭 교직 생활을 해 왔듯 엄마 역할도 그렇게 해나갈 수 있을까?

남편은 자기는 두 딸을 잠시도 혼자 못 보면서 내게 온갖 '엄마로서의 자존감을 깎는 비난'을 해댔다. 왕복 세 시간을 통근하던 내게 '반찬을 손수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비난인지. 자신은 나보다 출근을 훨씬 늦게 하면서 요리는커녕 반찬가게 하나 알아보지 않았으면서. 아이들을 때린 후, 특히 경찰에 고소를 하고 처분을 받은 이후의 그의 이런 적반하장식 비난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졌다. 툭하면 집에서 녹음을 하기 일쑤였고 '너는 뭐 문제가 없는 줄 아느냐?', '너도 형사 고소당해서 교사 생활 끝나 볼래?'라는 협박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제정신으로는 살 수가 없는 나날들이었다. 되돌아보건대 그는 정녕 가족이 아니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재로 돌아와 본다. 거지가 겨울을 지나듯 다행히 나도 그 시절을 죽지도 않고 지나왔구나. 지금껏 잘해 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라는 데에,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데에 이제 좀 더 집중해야지 싶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두 딸을 키워낼 거고, 맨 처음 먹었던 마음처럼 최소한 '삶을 증오하지 않는', 나아가 '살아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으로 키워내 보이고야 말겠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삶을 사랑하고, 원수를 불쌍히 여기고, 그리고 이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어진 삶을 계속 살아가겠다는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 유튜브 방송이 어떻게 편집이 될까? 잘 다듬어진 영상 속 내 얼굴을 가만가만 바라보며 '잘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다'라고 격려해주고 싶다. '너 참 고생했어', '그 시절을 지나오느라 너무너무 수고했어'란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