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무 성(性)도 아니고 싶다
마치 장마가 온 것처럼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었다. 교직원 식당에서 점심 급식을 먹고 일어나는데 뒤에 앉아계시던 한 분이 다급히, 그러나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저기 선생님, 옷 뒤에... 피가 조금 묻었어요."
생리 때 옷매무새를 단단히 하지 않고 나갔다가 옷에 혈흔을 묻혀본 경험은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개미 소리만큼 더 작은 목소리로 "네, 감사해요."라고 답했다. 마침 퇴식 줄 맨 마지막에 서있던 게 얼마나 다행이던지. 비도 오는 날 아침에 괜히 밝은 색 옷을 골라 입었나 후회되었다. 교실로 다시 올라가며 앞에 가는 선생님들을 절대 앞지르지 않게 태연하게 느릿느릿 걸었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드리고 겨우 내 교실에 도착하고 나니 안도의 한숨이 들었다. 마스크 안 내 얼굴은 화끈거렸다. 이럴 때 마스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선생님들께서 각자의 교실로 들어갈 만큼의 시간차를 둔 후 화장실로 직행했다. 당연히 연베이지색 여름 바지에 묻었을 줄로 예상했던 핏자국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위에 입은 흰 블라우스에 묻어있었다. 미리 가져간 물티슈 두 장으로 빡빡 비볐더니 조금씩 옅어져 갔다. 아예 손이 닿기 어려운 위치에 묻은 혈흔은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서 대충 선명한 붉은 기만 빼내었다. 작업을 대충 마치고 나니 그래도 바지보다 덜 민망한 상의에 묻어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출산 후 안 그래도 많던 생리 양이 더 많아져서 미레나라는 루프를 몸 안에 넣었다. 안 그러면 평생 철분제를 먹어야 한다고 의사가 그랬었다. 루프를 설치한 지 2년이 넘은 요즘은 생리가 조금씩 한 달 정도 지속되다, 또 한 달은 아예 없기도 하고 그런다. 그날 그렇게 '생리로 인한 불편'을 몸소 느끼고 나니 새삼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그리고 반문해보았다. 도대체 이 '여자여서 겪는 불편함'은 언제 끝나냐고. 생리, 임신, 출산... 이미 난 이 세 가지 모두 다 해 보았는데 언제까지 여자라는 사실을 계속 눈으로 확인하고 지내야 하는지.
언젠가 마침내 폐경이 되면 여성이라는 그 구분에서 자유로워질까? 난 이제 그저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은데. 성별 없이. 아직 자연은 그걸 허락해 줄 마음이 없나 보다.
퇴근을 하며 무심코 켠 라디오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오늘은 절기상 소만입니다. 초봄은 바싹 마른 느낌이 있는데 이제는 어딜 봐도 물기가 가득 차 있지요. 소만은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랬다. 이제 막 봄으로 접어들 때에 비해 모든 생물이 물기를 머금고 푸른빛을 더하며 쭉쭉 싱그럽게 자라는 그런 시절이 지금이었다. 그러자 다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내가 생리를 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보아야 할 어떤 현상이 아닐까 하고. 다시 누군가의 여자가 된다고 하면 어떨까? 아,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 지금은 그저, 내가 아직도 여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정도로 하고 넘어가야겠다.
한 달에 한 번, 피로써 여자임을 확인하는 모든 여성에게 우리의 고단한 삶을, 차라리 사랑하자고 할까. 그래도 다시 태어나라고 한다면 역시 여자를 선택할 내 아이러니여. 자연 안에 순리대로 여성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내 선택 불가능함이여. 아, 봄은 청명하고 끝나지 않은 생은 더없이 힘들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