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모처럼 1박 2일 면접교섭을 하기 위해 다시 2주 만에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 어제 사놓은 케이크 한 조각을 먹으려 카누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한 잔 뜨겁게 탔다. 우연히 가을 재즈 음악 채널을 틀게 되어 핸드폰으로 듣다,
'블루투스 스피커가 있었지, 참.'
하고 기억이 났다. 지금은 만나지 않는 J가 선뜻 주었던 그 스피커다. 한동안 떠오를 때마다 미웠던 그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너는 잘 지내고 있을까.
집에 있는 물건 중에 아직도 이전의 떠나온 집을 떠올리게 하는 게 있다. 이사하며 그렇게 많이 버렸는데도 말이다.
신도시의 새 집으로 처음 전세를 구해왔을 때 딱 한 번 전남편이 직장 동료 여럿과 집들이를 왔다. 어떤 선물을 받고 싶냐고 내게 직접 물어보길래 '코렐 접시 세트'를 말했다. 너무 부담되지 않으면서 튼튼하고 가벼워서 오래도록 쓰기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해서 지금 집 찬장에도 그 4인 세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날의 북적임, 손이 작은 내가 여러 사람 치 밥을 한다고 했는데 모자라서 결국 추가로 어묵탕을 끓이던 일, 그리고
"조미료를 안 썼는데 어떻게 이렇게 맛있어요?"
하던 안경 낀 체구가 좋은 남편 동료의 말과 그에 따라 활짝 피어나던 남편의 얼굴까지.
그날의 분위기는 그 그릇을 꺼내어 쓸 때마다
어떤 날은 짧게,
어떤 날은 서럽도록 길게 스쳐 지나간다.
혹시 믹스커피를 찾은 손님이 올까 봐 버리지 않고 놔두었던 맥심 봉지 커피를 아침에 버렸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손님은 거의 없고, 그사이 유통기한이 넘어버렸기 때문이다. 원래는 작년에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며 바쁜 와중에 인터넷으로 장을 보며 시킨 품목이었다. 혈압이 심해지고부터 나는 카페인 든 커피는 먹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먹으려고 산 게 아니라 당시 일요일마다 오시던 나이 지긋한 베이비시터분께 드리려고 샀었다. 왕복 세 시간 동안 만원 지하철을 갈아탄 뒤 버스로 출퇴근하던 중에도 부족한 물건이 없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인터넷 쇼핑을 하던 그런 때였다. 커피를 시키는 인터넷 장보기와 베이비시터 시급까지 모두 내 월급에서 나갔다. 나는 실질적인 가장이자 엄마였다. 이렇게 매번 수금은 나한테 했으면서 나중에 나와 남편을 상담할 때는 은근히 남편 편을 들던 그분을 나는 이 방치된 믹스 커피를 볼 때마다 떠올렸다. 일요일 오전마다 파주에서부터 먼 길을 오셔서 두 아이를 봐주시는 데 대한 고마움과, 결국 아무 성과 없이 비싼 돈만 들이고 끝나버린 상담을 동시에 떠올랐다. 이제 미련 없이 수십 봉의 커피를 종량제 봉투에 쓸어 담아 버리고 나니, 이제 더는 이런 양가적인 마음으로 괴롭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홀가분하다.
그렇게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 조금이라도 돈을 아낀다고 산 저렴이 대용량 화장품도 이제 거의 다 썼다. 그렇다고 명품 화장품을 사 쓰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가격에 매이고 시간에 쫓겨 상품을 고르는 때는 지났다.
그리고 스스로가 대견스럽다. 도대체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왔나?
한 번은 낼모레 나이 마흔인데도 아직 한 번씩 얼굴에 뭐가 나는 딸을 보다 못해 엄마가 신문에서 봤다며 둥그런 비누 두 개를 내미셨다. 비누는 알칼리성이 강해 분명 피부 건강에 안 좋을 텐데 싶었지만 아무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 몇 번 살짝 써보고 효과가 없다 싶자 세면대에 방치해두다시피 했다. 귀한 비누라 하니 손을 씻는 데는 차마 쓰지 못하고 그렇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는 아예 저쪽 화장실로 옮겨버렸다. 세수할 때마다 그 비누가 나를 보고
"얼굴 관리해야지."
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였다.
살다 보면 이렇듯 물건과 함께 집에 이야기가 쌓여간다. 그래서 이런 물건이 없는 곳으로 한 번씩 여행을 가고 싶다. 일종의 도망이라 해도 좋다.
버릴 만큼 버렸는데 쓸모와 기억 사이에서 고민하다 버리지 못한 물건이 아직도 함께 있다. 신도시의 여러 개업한 가게에서 받은 머그컵, 전남편이 회사 식당에서 이벤트에 당첨돼 가져온 머그컵, 함께 고른 포크와 나이프 세트... 기억한다는 건 때로 저주인 걸까. 할 수만 있다면 모두 없애버리고 새로 시작하고 싶은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