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카르충 (January 2014)
배낭 하나 덜렁 매고 집을 나온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 때였다. 중국에서 시작해 티벳을 거쳐 네팔까지 혼자 시작한 여행이 다섯이 되었다가 다시 여덟이 되고, 이제 또 혼자가 될 시간이었다. 원래 여행의 순간에는 일상의 흔적을 조금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 혼자 하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는 신조를 굳건히 지켜왔고 그 신조대로 늘 혼자 하는 여행에 익숙한 나였지만, 티벳과 네팔 트레킹을 거치면서 보기만 해도 굉장함에 압도되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고 험한 자연과 특유의 환경 때문에 다섯이, 혹은 여덟이 꽤나 익숙해졌던 모양이다. 심지어 티벳 여행을 함께 했던 친구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을 텐데도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 카트만두에서 며칠을 하는 일 없이 보냈다. 나의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을 함께 해준 가족 같은 친구들에 대한, 혹은 그런 이들을 각자의 길로 떠나 보내는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나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을지도.
결국 한국에서의 조우를 기대하며 터키로 넘어가 여행을 계속하는 S가 먼저 떠나고, K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한국으로 돌아갔으며, 독실한 불교도인 Y는 인도로 넘어가기 전 부처의 탄생지인 룸비니로 향했다. 둘만 남게 된 L와 나는 굳이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사실 속내는 왠지 몹시도 허전하고 쓸쓸해져 몸에서 공기가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여행을 할 때마다 늘 있는 일이었다. 만남과 헤어짐의 순환 속에서 내 몫으로 주어진 감정들을 안고 묻고 털어내며 발걸음을 옮겨왔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나, 라며 애써 스스로를 위안하고 내가 가야 할 곳을 찾았다.
네팔 헬람부(Helambu) 지역에 있는 산골 마을 카르충(Kharchoung). 네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는 정말 작은 산골 마을인데다 특별한 관광지가 아니어서 더더욱 여행자들은 발길을 할 일이 없는 곳이다. 굳이 그 장소에 대한 의미를 찾자면 그 곳에는 <십만가요>를 남긴 티벳 불교 승려 밀라레파가 9년간 수련하여 깨달음을 얻었던 동굴이 있어 티벳 불교 신자들에게는 성스러운 마을로 여겨진다. 티벳 불교 신자가 아닌 나에게는 밀라레파의 동굴이 그 곳에 가는 목적이 아니었다. 헤어짐의 아쉬움이 내 마음의 표면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당연히 이제 원래대로 나답게 혼자이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이왕 혼자가 될 것이라면 쓸쓸하고 허전한 감정 때문에 여행에서 겪는 가장 무서운 병인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들 가능성이 없지 않았지만, 나는 아예 그 외로움에 몸과 마음을 맡겨 버리기로 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고립된 곳에서 철저하게 외로워지고 나면 다시 혼자 길을 나설 용기가 생기리라.
그렇게 철저한 외로움을 선택한 나에게 쥐어주는 마지막 선물처럼 맑고 화창한 아침, 나는 인도로 향할 L을 뒤로 한 채 카트만두를 떠났다. 카트만두에서 카르충까지 가는 길은 말 그대로 격렬하고도 소박한 영화 한 편 같았다. 의자가 제대로 고정된 좌석도 거의 없는데다 짐칸도 따로 없어 사람과 짐들이 뒤엉키고, 에어컨은 커녕 창문이 제대로 열리는 곳도 몇 군데 되지 않는 진짜 네팔식 로컬 버스를 타고 가야 카르충에 도달할 수 있다. 완행버스처럼 5분에 한번씩 멈추고 사람을 태우고 내려주는 것은 예사이고, 버스비를 받는 차장은 쉼 없이 거리의 사람들에게 호객행위를 하며 소리를 내 지른다. 그렇게 버스는 내 엉덩이 두 쪽이 의자에 제대로 붙어 있는지도 확인하기 어려울만큼 널뛰기를 뛰듯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8시간을 꼬박 달린다.
버스가 카트만두를 떠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불현듯 불길한 기운이 정신 없는 내 머리를 깨운다. 이상하게도 가끔 한번씩 이렇게 불길한 예감에 휩싸일 때가 있는데 나는 이것이 말로만 듣던 여자의 육감인가, 라며 신기해 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제법 그 예감이 잘 맞아 떨어진다는 것에 있다. 점퍼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침에 버스 앞에서 귀여운 동네 꼬마 사진을 찍고 넣어 두었던 휴대폰이 없다. 갑자기 띵- 하는 머리 속 경고음. 황급히 머리 위 선반에 올려 두었던 가방을 내려 지퍼를 열었다. 지난 두 달 간의 추억이 모두 담긴 카메라도, 드로잉북과 일기장도 없다. 작은 주머니를 펼치니 선글라스도, 전기 공급이 불안정한 네팔에서 유용하게 썼던 랜턴도 없다.
이럴 수가!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백지가 되어 버린 듯 했다. 내가 마주친 이 현실이 진짜 세계가 아닌 꿈이 아닐까, 수도 없이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버스는 혼돈의 상태로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 거부하고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진실이었다. 주변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미친 사람처럼 덤벼들어 물었다.
“내 가방을 모조리 다 도둑 맞았어요. 핸드폰도 카메라도 일기장도 다 사라졌다구요. 아침에 내 배낭을 올리는데 도와준 남자 얼굴 기억하는 사람 없어요? 운전기사 아저씨나 차장은 그 사람들 알 수도 있잖아요!”
거의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물어대는 나를 보고도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이 버스 안에서 유일한 외국인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웅성웅성 할 뿐, 별다른 대답을 주지 못했다.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 앉아 아침의 상황을 찬찬히 떠올려야 했다.
“작은 배낭은 아래 짐 칸에 못 넣으니까, 여기 좌석 위에 선반에 놓고 큰 배낭만 짐 칸에 넣고 와.”
“그럴까요?”
그 때 난 귀중품이 들어 있던 작은 배낭을 버스 바깥에서도 내 눈에 보이도록 선반에 올려놓고는 큰 배낭을 짐 칸에 넣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금방 또 다시 다그친다.
“이봐, 짐 칸에 안되겠어. 그냥 다 버스로 가지고 올라 타.”
그렇게 배낭을 여기에 놓아라, 저기에 놓아라, 하며 나를 버스에서 두어 번 오르락내리락 하게 만들었던 이 3인조가 바로 범인이었던 것이다. 결국 배낭을 모두 가지고 버스에 올라 탔고, 좁은 버스 통로에서 서로 반대로 스치는 찰나에 나를 에워싸 그 틈에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빼내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버스 밖으로 나간 시간이 1분도 채 되지 않는데다 계속 선반 위에 올려놓은 작은 배낭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느 틈에 이 모든 것을 가져간 걸까. 짐에 대해 왈가왈부 하길래 버스회사와 관련 있는 사람일거라고 대책 없이 믿어버린 나를 탓해야 하는 걸까.
십 년이 넘게 배낭여행을 하면서 복대를 차 본 적도, 자물쇠를 채워본 적도 없이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며 다양한 곳을 떠돌아 다녔어도 한 번도 이런 사건이나 사고가 없었던지라 나는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는 지금 친구들과 헤어지고 외로움을 더 큰 외로움으로 극복하러 가던 이별 여행 중이었다. 갑자기 서러워졌다. 헤어짐의 순간에도 어른스러움을 가장하여 꾹 참았던 눈물이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차라리 돈이 들어있는 지갑을 가져가지, 지난 시간이 모두 담긴 카메라와 일기장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더 견디기 힘들었다. 티벳에서부터 네팔 트레킹까지 우리 다섯 명이 함께 한 기억이 모두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내 눈물을 보고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버스 안은 더 술렁술렁해졌지만, 어느 누구도 나에게 위로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이 곳이 어딘지조차 모른다. 카트만두에서 헬람부 지역 어디쯤 카르충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것밖에는. 이미 카트만두를 떠나온 지 두 시간이 되어 가고 내가 이 버스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애초의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냥 정신을 놓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다.
여행을 하는 것도, 버스를 타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생각을 하는 것마저도,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기만 한 순간에도 시간은 꼬박꼬박 착실하게 흘러갔고, 카트만두에서 출발한 지 7시간이 조금 넘어 정말 산 속 한복판 카르충에 도착했다. 카르충이 종점인 줄 알았는데, 종점으로 가는 도중에 잠깐 내려주는 곳이었다. 내가 도난사건으로 버스 안에서 난리를 피우고 카르충에 간다고 알리지 않았으면 제대로 내리지도 못할 뻔 했다. 내려서도 나는 무엇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았다. 산 계곡을 따라 1~200미터마다 집이 한 채씩 있는데다 다 합쳐도 30가구도 안될 것 같아 보이는 이 마을의 버스 정류장에는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고 헤매는 내 발자국만 무수히 쌓이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차도 없어. 곧 저녁이 될 테고. 일단 마을 주민에게 오늘 하루 밤만 신세지는 수 밖에…’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그 허망한 발끝에서 처음으로 할아버지 한 분을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영어를 아예 이해하지 못하셨고,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온 몸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혹시 비어있는 방 있을까요?”
“지붕공사 중인 저 방이 있긴 있지.”
“저 오늘 하루 밤만 재워 주세요. 사례는 할게요.
”그래. 방은 100루피면 되고, 밥은 끼니당 150루피면 돼.”
사례에 대하여 받아본 적이 없으신 듯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결국 최소한의 비용을 드리기로 했다. 겨우 30분만에 대화를 끝내고 지붕공사 중이라 천정 사이로 하늘이 훤히 내다 보이는 방에 짐을 내려 놓았다.
‘나는 이제 뭘 해야 하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게 벌어진 일에 대하여 현실적인 생각이란 것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방에서 나와 밀라레파 동굴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산 계곡을 타고 들어간 그 곳은 관리하시는 주민 할아버지 밖에 없어 고요함만이 내려앉은,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장소임에 틀림없었다. 이런 순간에 기도나 절을 하며 마음의 평화를 붙잡고 싶은 것은 나의 이기적인 마음인 걸까. 한참을 부처님 앞에서 이처럼 이기적인 마음이라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원하며 앉아 있었다. 너그러우신 부처님이 내 기원을 들어 주셨던 건지 머리 속이 정리가 된 듯 했고, 바로 뛰어 나와 산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며 온 마을에 전화가 있는지를 물었다. 공중전화든, 집 전화든 국제전화를 할 수 있는 전화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이 산골에 그런 것이 있을 리도 없고 설사 있다고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빡이는 순박한 동네 사람들이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질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 때, 오늘밤 묵을 집에서 나오는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네가 오늘 우리 집에서 묵을 손님이구나. 할아버지한테 들었어. 나는 걀튼Gyalten이라고 해.”
“아, 내 이름은 애니야. 그런데 저기…혹시 너 휴대폰 있니?”
“응, 있어.”
“처음 만나서 부탁하는 거라 미안하지만, 내가 전화비 충전카드를 살 테니까 한국으로 국제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을까?”
“그래. 문제될 것 없어. 우리 할아버지가 조그만 상점을 하시니까 전화비 충전카드는 그 곳에서 사면 돼.”
카르충에 유일한 학교의 영어선생님인 걀튼Gyalten을 만나 다행히도 전화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바로 큰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내가 겪은 힘들었던 상황을 대략 설명하고, 모든 개인정보가 입력되어 있는 휴대폰 분실과 일기장 파우치에 함께 넣어 놓았던 신용카드의 분실 신고를 부탁했다. 아무리 내가 충전비를 내겠다고 했지만 국제전화를 쓰는 것이 미안해서 길게 통화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전화할 때 마주 앉아 기다리던 걀튼Gyalten이 통화 도중 감정이 북받쳐서 울컥하는 것을 본 모양이다. 별 일 아니라고 해도 끝내 그 이유를 들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사실을 오늘 카트만두에서 여기로 오는 버스 안에서 도둑을 맞아서 카메라, 휴대폰, 일기장 등등 모두 잃어버렸어. 그래서 내일 다시 카트만두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내 말에 걀튼Gyalten이 더 충격 받은 얼굴이다. 그러더니 잠깐 나갔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애니, 오늘 너에게 힘든 일이 생겨서 정말 유감이야. 그래서 오늘 밤은 여기서 너희 집처럼 편하게 묵어도 돼. 돈은 받지 않을 테니까 그냥 푹 쉬고 갔으면 좋겠어. 우리 가족이 보이는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줘.”
낯선 사람에게 건네주는 그 따뜻한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진심으로 활짝 웃어주며 고맙다고 크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직은 마음의 상처가 더 아파 겨우 희미한 미소로 화답할 수 있었다. 그날 밤, 할아버지와 할머니, 큰 집 식구들과 작은 집 식구들까지 온 가족이 모두 모여 다같이 저녁을 먹는데도 나는 그 시간의 따뜻함을 온전히 느낄 수가 없었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하늘의 별이 나무천장 틈새로 보이는 방에 누워 스트레스성 속쓰림과 지독한 고독함과 실제인지 아닌지 모를 추위와 밤새 싸워야 했다.
다음 날 아침, 할아버지가 마니차를 돌리며 울리는 종소리에 잠이 깼다. 식욕도 없고, 하루 만에 떠나야 하는 가족들에게 사람의 흔적을 남기기도 애매해서 대충 짐만 싸서 버스 시간 맞춰 나가려고 준비하는데, 할머니가 아침밥 먹으라며 내 팔을 잡아 끌었다. 따뜻한 버터차와 짬빠였다. 티벳인들의 주식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 티벳에서는 제대로 맛보지 못한 음식이었다. 행여 찻잔이 비워질 새라 옆에서 끊임없이 살피며 차를 따라주시는 할머니 덕에 배부르게 아침을 먹고도 할머니는 후식으로 홍차까지 내려 주셨다. 속이 따뜻해지니 한결 마음도 차분하고 평온해지는 듯 했다. 버스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 하루 분의 숙박비와 식사비를 할아버지께 내밀었다. 돈을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갑자기 찾아와 모두 주는 대로 받고만 가는 것은 왠지 좀 염치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제 말한 것처럼, 우리 가족은 너에게 돈을 받을 수 없어. 네가 이 곳에서 편안히 쉬었으면 됐어. 절대 돈은 받을 수 없어.”
할아버지는 단칼에 내가 내미는 돈을 거절하셨다. 그래도 그냥 가는 것은 마음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사람, 두 사람, 온 식구들이 주머니 속 돈을 걷어 오히려 나에게 쥐어 주었다.
“애니, 이건 네가 불쌍해서 주는 게 아니야. 네팔 사람으로 인해서 네가 고통 받았으니 우리 가족이 대신 그것을 조금이라도 갚는다고 생각해 주면 안되겠니? 그리고 사고이긴 했지만 모든 일을, 그리고 네팔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온 가족을 대표하여 전하는 걀튼Gyalten의 말에 나는 또 한번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너무 고맙고, 너무 미안하고, 너무 따뜻하고, 너무 뭉클하여 그 자리에 서서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꼭 안고는 함께 눈물을 흘려 주셨다. 기본적인 의사소통도 힘겨운 상황,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낯선 사람들에게 이렇게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는 마음을 전해 받을 수 있을까. 사람을 통해 받은 상처가 또 다른 사람을 통해 치유 받는다. 이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나는 카르충까지 오는 험한 여정을 따라 온 걸까. 그렇게 할머니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우는 동안,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까지도 나의 이야기를 가족들로부터 전해 듣고는 어김없이 호주머니에서 가진 돈을 꺼내어 전했다. 이 크나큰 마음을 내가 모두 받아도 괜찮은 걸까. 그들도 풍족하지는 않을 터였다. 험난한 자연환경 속에 살고 있고, 문명의 편리함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그저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내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도 함께 하는 따뜻한 사람들의 힘이 그들을 살게 하는 든든함이라는 사실이다. 우연히 찾은 네팔의 산골 작은 마을에서 나는 너무 큰 상을 받고 돌아간다. 인생에서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쉽게 잊고 사는 본질을 이 곳에서 찾은 느낌이었다.
겨우 울음을 멈추고, 얼굴은 엉망이 된 채로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카트만두행 버스를 타러 갔다.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은 정류장까지 함께 나와 버스를 탈 때까지 든든한 내 가족이 되어 주었다. 어제 내가 타고 왔던 버스가 윗동네에서 내려와 다시 나를 태우러 왔을 때,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이 버스 운전기사와 차장을 둘러싸고 실랑이 하기 시작했다. 실랑이의 내용인즉슨, 이 한국 친구가 어제 이 버스에서 카메라, 휴대폰, 일기장 등등 다 도둑을 맞았다, 그러니 유의해서 신경 써 주고 카트만두에 갈 때까지 잘 데려가길 바란다, 이런 내용이었다. 끝까지 무턱대고 내 편인 사람들…. 그리고도 무슨 언질을 해두었는지 버스 차장은 나에게 버스 요금도 받지 않았다.
카르충에서 그들을 떠나오는 순간 나는 이미 결심했다. 카트만두에서 급한 일을 수습하는 대로 카르충으로 돌아가 내가 하루 동안 받은 마음과 사랑을 조금이나마 보답해야겠다고.
카트만두로 돌아오자마자 경찰서에 도난 신고부터 해두고, 다시 휴대폰과 신용카드의 문제를 제대로 처리해 두었다. 그리고는 아직 카트만두에 머물고 있던 L과 버스터미널로 가서 주변을 속속들이 살펴보기도 했다. 혹시 훔치고 나서 자신들에게 필요 없는 일기장은 터미널 주변에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쓰레기 더미까지 놓치지 않고 뒤졌으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틀 만에 카트만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으니, 그 이상의 일은 포기해야만 했다.
세상 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다.
당시에 내가 읽고 있던 소설책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한 구절이었다. 나에게 벌어진 일은 그 일일 뿐, 나는 이제 다시 카르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카르충 사람들이 모아준 돈이 얼마인지 세어 보니 배낭여행자로서는 꽤나 큰 돈이었다. 그 돈을 그대로 카르충 사람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보았던 집 안의 어른 6분에게는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해 줄 야크 목도리를 사고, 꼬마 아가씨 4명에게는 예쁜 머리핀을 샀다. 그리고 또 셀 수 없이 많았던 동네 사람들에게는 함께 나누어 먹을 과일을 종류별로 샀다. 산골 마을인데다 가장 가까운 시장에 가려 해도 버스로 3시간이라 아마 과일을 많이 먹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부푼 마음까지 산더미같이 끌어 안고 나는 떠나온 지 사흘 만에 다시 8시간 버스를 타고 카르충으로 향했다.
사흘 만인데도 모든 것이 사뭇 달라 보였다.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때는 눈 앞이 캄캄해 그림 같은 자연풍경도, 따뜻한 사람들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인다. 아주 근사하고 사랑스럽게.
앞뒤 배낭을 매고 과일이 잔뜩 들어있는 보퉁이까지 끌어 안고는 조심조심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할머니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보라보고 있었다. 사흘 만에 다시 돌아온 내가 이상해 보이셨나 보다.
“타시텔레!”
반갑게 인사하며 할머니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온 식구 모두 집 나갔던 가족이 돌아온 듯 그저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그 날 저녁 큰 집, 작은 집 식구들은 물론이고 동네 사람들까지 와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제대로 서로 눈도 못 마주치고 우울함에 빠져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밥이 어찌 그리 맛있던지. 다시 한번 감사하는 마음으로 깨끗이 밥을 다 먹고는 카트만두에서 준비해 온 선물을 풀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탓에 내가 준비해 온 야크 목도리가 부족했지만, 어른들을 가족과 동네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사이 좋게 나누어 목에 두르고는 예쁘다며 즐거워하셨다. 머리를 묶는 고무줄이 전부였던 아이들은 내가 건넨 머리핀을 꽂고는 연신 싱글벙글 이었다. 그리고는 다 함께 과일을 나누어 먹는데, 파인애플을 처음 먹어보는 걀튼Gyalten은 어떻게 잘라야 할지 몰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결국 내가 잘라 맛을 보여드리니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새콤달콤 맛있다 하시면서도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에게 더 권하셨다. 나는 내가 받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돌려드리려 했던 것뿐인데 고맙다, 고맙다, 라며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다음 날부터 나는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애들 손을 잡고 학교에 가서 외국인을 처음 보는 커다란 눈망울의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곧 다가올 설 명절을 맞이하여 수백 개에 달하는 집안 그릇과 물통을 모두 꺼내어 씻고 광 내는 것을 돕기도 하고, 이웃집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49일을 기리며 동네 사람들 모두 모여 기도하고 밤 늦도록까지 술과 음식을 나누기도 하고, 학교 선생님이 된 것처럼 애들 학교 소풍날에는 계곡 건너편 산까지 같이 가서 하루 종일 피크닉을 함께 하고, 이웃집에 결혼식이 있어 함께 축하해주고 잔칫날을 흠뻑 즐기기도 하고. 동네 사람이 된 듯 시간이 모자랐다. 그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떠올리면 행복한 기억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나는 이미 이 곳에, 이 곳 사람들에게 푹 빠져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밤이 되었을 때,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온 동네 사람들이 둘러 앉았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다가. 술도 한 잔, 차도 한 잔. 그러다 어느 순간 올려다 본 하늘에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본 중 가장 많은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 졌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 주세요.’
나는 아무도 모르게 그 하늘에 대고 기도했다. 부처님의 하늘 아래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사는 좋은 사람들을 오래오래 지켜 주기를.
일주일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티벳에서 네팔로 넘어올 때 받았던 비자의 만료일이 다가왔다. 이제 떠나야 할 때였던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제 저 가 볼게요. 설날도 함께 보내고 싶지만 꼭 다음에 다시 올게요. 꼭!”
“그래. 넌 언제라도 환영이야. 애니 넌 이미 우리 가족이니까.”
어김없이 눈물이 차오른다. 먼 길 가는데 조심하라며, 발걸음을 옮기는 내 손에 단단히 쥐여준 짬빠 한 봉지는 이 가족의 마음만큼이나 묵직하다.
두 달 전, 제임스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샹그리라’를 찾겠다며 티벳으로 향했었다. 그런데 나는 엉뚱하게도 네팔의 산골 카르충에서 ‘샹그리라’를 찾은 듯 했다. 사고를 겪으며 우연한 기회에 이 곳에 닿았지만 이 곳은 네팔 사람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리는 숨겨진 세상. 그리고 나는 이 곳에서 무엇보다 선하고 따뜻한 눈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행복하다면 이 곳이 ‘샹그리라’가 아닐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번 여행 내내 나만의 ‘샹그리라’를 떠돌고 있는 셈이다.
카르충에 와서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네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불평불만 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삶, 이웃이 가족이나 다름없이 가까이에 함께 하는 삶, 가족이 가족답게 일상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삶.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이 곳으로 초대하고 싶다.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