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랑탕 히말라야 (January 2014)
이번 네팔 여행은 특별했다. 5년 전 이미 엄마와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한 번 했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네팔에 다시 갈 계획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어떤 힘이 나를 그 곳으로 이끌었고, 나는 네팔에 다시 가야만 했었다고 믿고 있다.
시작은 중국 사천성과 운남성, 그리고 티벳을 돌아보기 위해 떠난 여정이었다. 총 여행기간을 3~4개월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중국 내부 사정으로 인하여 티벳의 자유여행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고, 모든 여행객들은 중국 내 여행사와 연결하여 가이드와 운전기사를 고용하여 정해진 루트를 따라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그나마도 입경허가서가 쉽게 나온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자유여행이 아니라니 포기할까 싶다가도, 지금이 아니면 재빠른 세상의 흐름 속에 티벳의 고유 문화는 점점 더 변해갈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한시라도 빨리 티벳문화가 살아 숨쉴 때 그곳에 발을 딛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여행하는 데에 드는 (자유배낭여행자로선) 비싸디 비싼 여행사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비슷한 날짜에 출발하는 동행을 네 사람 구하게 되었다. 배낭여행이 처음인 23살 여대생 S부터 25살 순수하기 그지없는 대학생 K, 27살 세계일주를 시작하는 친구 Y, 33살 미디어아트 예술가 L까지, 다채로운 동행이 구성되었다. 티벳 입경허가서를 신청할 때 미리 여행 루트를 정해서 신청해야 했는데,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티벳에서 네팔로 육로국경을 넘어가는 루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량과 기사, 가이드까지 비용 절감이 가난한 여행자의 발목을 묶어 나도 함께 네팔로 넘어가게 되었다.
5년만에 다시 오게 된 카트만두의 타멜(Thamel) 거리는 거짓말 보태지 않고 정말 그대로였다. 내가 지난 5년을 건너뛰어 시간여행을 왔나 싶을 정도였다. 늘 목마른 사람처럼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나이기에 한 번 왔던 여행지를 다시 온다는 것에 대한 마땅찮음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오고 나니 꼭 고향에 와서 추억 찾기 하는 기분이랄까. 나쁘지 않았다.
원래 티벳에서만 5명이 함께 다니고, 네팔에 오면 각자의 일정대로 움직이려고 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3~4000미터는 우습게 오르내리는 신들의 땅인 티벳에서 10일 간 고산병을 비롯하여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어느새 가족 같은 존재가 되었고 몸이 고된 여정이 될 히말라야 트레킹을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안나푸르나를 한번 다녀온 나를 배려하여 이번 트레킹 코스는 랑탕계곡으로 정했다.
십여 일의 트레킹을 건강하게 소화하기 위해서 티벳에서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우리는 트레킹 전 카트만두에서 일주일 간의 휴식기를 가졌다. 트레킹을 떠나기 전 날, 우리가 묵고 있던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으로부터 우리와 그 시간을 함께 할 포터를 소개 받았다. 한창 겨울이라 방한장비도 많았고, 이미 고산병으로부터 취약한 동행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네팔 현지 친구들을 사귈 기회로 삼기로 했기 때문에 포터가 세 명이나 함께 하게 되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한국말을 곧잘 하는 노빈Nabin, 듬직하고 믿음직한 떼게Tek, 귀여운 막내 동생 같은 쿠마르Kumar, 그리고 우리 다섯 명이 함께 하는 랑탕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첫 날은 로컬 버스를 타고 트레킹 시작점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우리는 아직 서로에게 어색했다. 좁고 더럽고 덜컹거리는 로컬 버스 안에서 행여나 우리가 불편할까 계속 뒤돌아 보며 우리를 확인하는 이 친구들.
“괜찮아. 우리는 네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이런 거 좋아해!”
살갑게 말해 주었지만, 믿지 않는 눈치다. 포터 중 리더 격인 노빈Nabin은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에 신경 쓰며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었다. 7시간 정도 울퉁불퉁한 흙먼지길을 달려 샤브루베시(Syabrubesi) 도착했고, 다 같이 남은 오후 시간을 산책 겸 동네 구경도 하고 계곡에 내려가 쉬기로 했다. 그 때 처음으로 이 네팔 친구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하게 되었다.
“넌 나이가 몇 살이야?”
“랑탕은 몇 번이나 와 봤어?”
“많이 힘들까?”
계곡의 너른 바위에 다같이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거의 대부분 우리 쪽의 질문세례였다. 그들은 수줍은 탓인지, 아직은 우리가 낯선 건지 영어로 대화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 친구들이 모두 우리 또래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부터 이미 거리낌 없이 마음을 활짝 열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될 것을 약속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날 밤, 내일부터 시작될 본격적인 트레킹을 대비하여 일찍 잠자리에 드려 하는데 아무래도 속이 좋지 않았다. 급체 한 것 같았다. 길 위의 삶이 나의 숙명인 듯, 여행 중에는 아픈 적도 없고 5000미터 이상 올라가도 고산 증세가 전혀 없던 나였는데 저녁 때 마신 맥주 탓인지 속이 답답해 누울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고지대로 올라가면 위험하니까 낮은 곳에 있을 때 마셔두어야 한다며 맥주 한 잔 한 것이 화근인 듯 했다.
‘앞으로 트레킹 중에는 꼼짝없이 참아야 하겠구나.’
그 때, K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누나, 체 했을 때는 이게 특효야.”
라며, 바늘로 내 손을 따고 피를 뽑아 낸 다음 차가워진 내 손과 발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Y는 따뜻한 차를 끓여 가져왔다. 그렇게 내 속이 달래질 때까지 그들은 내 옆에 있어 주었고 아마 땀을 뻘뻘 흘리며 마사지하던 K가 나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K는 항상 건강하기만 했던 내가 아픈 모습을 보고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고 했다. 그러니 이들이 나에게 가족이 아닐 이유가 없다. 낯선 사람이 내 친구가 되고, 내 가족이 된다. 나는 이것이 여행의 마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그 마법의 힘을 느끼며 여행의 한복판에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친구들의 정성으로 깨끗이 나았고, 랑탕 트레킹 대장정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히말라야 트레킹은 순조로웠다. 물론 매 발걸음을 뗄 때마다 등 위의 무거운 배낭에 깔리는 상상을 하며 거친 숨을 몰아 쉬고, 도저히 못 걷겠다 싶을 때쯤 숙소에 도착해 안도의 숨을 뱉는 날들이었지만, 우리는 8명이 함께였기에 즐거웠다. 매일 24시간을 함께 하며 며칠이 지나자 우리는 영어인지, 한국어인지 모를 언어를 쓰면서도 수많은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한국 노래, 네팔 노래를 돌려가며 따라 부르거나, 서로 힘들 때 업어주고,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쉴 때에는 서로의 몸을 마사지 해주며 우리는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밥 먹을 때에도 우리는 너와 내가 따로 없었다. 다같이 주방에 들어가 우리가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우리 식대로 음식을 만들어 네팔 친구들에게 맛 보여 주기도 하면서 네 것, 내 것 할 것 없이 서로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우리는 식구(食口)가 되어 갔다. 오후 서너 시 정도면 가던 길을 멈추고 롯지에서 다음 날 트레킹을 준비하는데, 우리가 서로 눈 마주치는 이 시간은 길고도 긴 저녁시간으로도 모자랐다. 날이 가면서 높이 올라갈수록 기온은 뚝 떨어지고 뜨거운 물은 부족하고, 덕분에 몇 일씩 제대로 씻지 못한 우리의 몰골이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깝게 하염없이 지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고 또 웃었다. 한국과 네팔의 카드게임을 서로 알려주며 승부욕이 발동해 이기려고 애를 쓰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얼음 계곡물에 대충 빤 속옷과 양말을 난로 위에서 서로 말려 주다가 홀랑 태워 먹거나, 난로 가에 한 치의 틈도 없이 옹기종기 모여서도 차가운 하얀 연기를 내뿜으면서 짜이를 돌려 마시던 시간들. 핫팩을 두세 개씩 붙이고 외투까지 모두 껴 입은 채로 침낭에 들어가도 추위에 한참을 잠 못 들었던 밤이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기꺼이 즐겁게 그 시간을 겪어 내고 있었다.
사건은 트레킹 5일째 밤 롯지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번 트레킹 중 계획된 가장 높은 고지인 롯지에 와 있었고, 다음 날 5000미터가 다 되는 정상을 밟기 위해 산 하나를 타야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Y의 상태가 심각했다. 티벳에서도 도착하자마자 고산 증세로 꽤나 고생을 했던 동생이기에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나와 K는 주변 롯지들을 돌아다니며 고산병 약이 있는 사람을 찾았다. 산소 스프레이라도 있으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겨울 히말라야 복판의 롯지에는 트레킹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약 정도 밖에 구하지 못했다. 일단 Y가 약을 먹고 상태를 살펴보는 동안 우리는 긴급 회의를 해야 했다. 내일 아침에도 Y의 고산병이 좋아지지 않으면 내려가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에 계획되어 있는 체르고리(Tsergo Ri) 정상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회의다. 우리는 꽤 오랜 논의 끝에 체르고리에 대한 미련이 조금은 남은 나와 K는 노빈Nabin과 체르고리를 올라갔다 오고, 체르고리보다 휴식을 택한 L과 S는 Y의 상태를 지켜볼 겸 테게Tek, 쿠마르Kumar와 함께 조금 내려가 다른 롯지에서 쉬는 걸로 결정을 했다. 그리곤 그 다음 날 쉬고 있는 롯지에서 다같이 다시 만나기로 말이다. 우리 모두가 이번 트레킹의 최정상 지점인 체르고리를 포기하는 것에 대하여 Y가 너무 미안해 했기 때문에 생각해 낸 방안이었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네팔 친구들에게 전했을 때 노빈Nabin이 갑자기 불평을 했다.
“포터가 세 명이고, 그 중 한 사람만 체르고리에 올라갔다 오는데 모두 똑같은 보상을 받는 게 말이 돼?”
그 순간, 나는 뒷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늘 한 발 앞서 우리들을 챙겨주던 노빈Nabin이었기에 더 놀랐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불현듯 눈물이 핑 돌았다. 순식간에 백만 가지의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 동안 여행을 꽤 여러 번 하면서 처음에는 사람을 향해 무작정 열리는 마음 때문에 매 순간 헤어짐의 고통에 시달렸고, 그래서 그들이 여행지에서의 인연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힘들어 했었기 때문에 부끄럽게도 이제는 그래도 내가 제어할 수 있을 만큼만 마음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 샌가 나도 모르게 또 마음을 활짝 열어 이들이 내 친구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렸나? 돈과 같은 이해 관계가 얽히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결합된 친구 말이야.’
‘이들도 트레킹이 끝나고 나면 또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겠지. 아무리 내겐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해도 이들에게 우리는 일 년에 마주치는 몇 십 명, 몇 백 명의 여행자 중 한 명일 뿐 일거야.’
‘친구라고 믿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우리가 결정을 내리고 나면 네팔 친구들을 따라와 주어야 한다는 고용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우리는 여행을 즐기기 위해 왔지만, 이 험한 산길이 이들에게는 생계의 수단인 것을 바보같이 잊고 있었다니. 고단한 발걸음에 돈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상념들에 나는 차갑고도 싸늘한 히말라야의 밤 공기를 맞으며 한참을 눈물을 흘렸다. 친구라면서, 나는 그들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친구라면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현실을 포장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체르고리는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므로 8명 중 5명이 가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철저하게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때로는 쓸모 없이 지나치게 감상적이어서 갑작스레 터진 울음보를 멈추고 이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우리는 아까보다 더 솔직한 모습으로 한참 동안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고, 결론을 내렸다. 서로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며 정상을 찍고자 하는 것이 우리 여행의 목표는 아니었다. 우리는 정상에 두 발을 디뎌야만 인정받는 탐험가가 아니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여행길에 올랐고, 행복하기 위해 히말라야에 왔다. 우리는 매 순간 진심으로 즐거웠고, 진심으로 행복했다. 그거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다음 날 전원 체르고리는 포기하고 Y의 상태를 지켜보며 휴일을 갖기로 했다. 노빈Nabin과도 감정의 찌꺼기가 남지 않도록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너희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해, 노빈Nabin.”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불평하고 화낸 것 같아서 내가 미안해.”
그렇게 우리의 다섯 번째 밤은 깊어졌다. 우리는 그 날 밤, 잠깐 무서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렸지만 한결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까지는 나 혼자 들뜬 일방적인 감정이었다면 이제는 왠지 서로의 깊은 부분까지 이해하게 된 상호 간의 감정이랄까. 눈물을 쏟았던 그 시간마저도 소중했다. 남은 우리들만의 시간이 더 기대되는 이유였다.
다음 날 Y는 다행히도 씻은 듯이 나았고, 각자 주변 마을을 산책하며 하루를 보냈다. 전날 음산하게 흐렸던 것에 비하면 날씨도 개운하게 맑았고, 하루를 쉬면서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니 그저 스쳐 지나갈 뻔한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사소한 즐거움들이 많았다. 물론 동네 어디서나 보이는 해발 7,256미터의 랑탕 리룽과 북서쪽으로 펼쳐지는 가네쉬 히말의 기막힌 전망도 눈부신 하루에 한 몫 했다. 역시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거칠고 힘든 시간을 지나 왔기에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이 따스한 햇살과 근사한 풍광이 아닐런지.
우리는 더 돈독해진 우정으로 남은 트레킹을 해쳐 나갈 수 있었고, 트레킹 중 두 번째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고사인쿤드(Gosainkund)를 오를 일만 남았다. 힌두교를 믿는 네팔 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지는 고사인쿤드는 가는 길마저도 너무 아름답고 환상적이어서 노래가 절로 나왔다. 모두들 천국에 가는 기분으로 마지막 고지를 향해 나아갔다. 낭떠러지 같은 절벽 길을 따라 한참을 올랐을 때, 길 너머로 보이는 세 개의 맞닿은 호수.
“아, 고사인쿤드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넋을 잃고 광대한 자연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두껍게 얼어버린 고요한 고사인쿤드 호수는 마치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에 나오는 명장면 중 하나인 찰스 호수 같다는 느낌이 들어 생각할 것도 없이 얼음호수 위에 벌렁 누워 버렸다. 그 고요함 속에 신비한 소리가 있었다. 누워 있는 차가운 등 뒤로 느껴지는 ‘둥둥’ 소리. 느긋하지만 생동감 넘치고, 조용하지만 거대한 힘이 느껴지는 ‘둥둥’. 신성한 호수라는 말을 들어서일까. 겨울 한 철일 얼음 아래 물 속 깊은 곳에서 생명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취해 우리는 한참을 호수에 누워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너무 추운 비수기라서 고사인쿤드에는 영업을 하는 식당이나 롯지가 없어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울 재료들을 준비해 올라온 터였다. 아껴 두었던 한국 라면과 전날 묵은 롯지에서 싸온 밥, 그리고 후식으로 인스턴트 커피까지. 계획은 완벽하였으나 아무도 물을 끓일 냄비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 것. 요리를 해주려던 네팔 친구들을 물러나게 하고 우리가 덤벼들었다. 주변의 돌로 바람막이를 만들고 스텐 밥그릇에 물을 끓여 봉지 라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물을 여러 번 끓여내야 한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우리에게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한 봉지 끓일 때마다 서로의 입에 먼저 한 숟가락씩 넣어주려 안달 난 모양새였으니 말이다. 여지없이 또 네 밥그릇, 내 밥그릇 없이 한 숟가락의 라면을 공유하며 장엄한 전우애까지 느꼈다고나 할까. 열악한 와중에 얼어서 돌덩이가 되어버린 밥까지 말아서 깔끔하게 해치우고는 후식까지 거창하게 차려 먹었다. 고사인쿤드의 성스러움이 그대로 느껴지는 식사 시간이었다. 화려한 상차림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밥을 먹는 내 눈 앞의 풍경이 굉장해서가 아니다. 또한 오랜만에 먹는 라면이 맛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산 위에 올라 마시는 인스턴트 커피가 별미이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지난 12일간 가족처럼, 친구처럼 내 곁을 지켜준 그들과 함께 있었고, 내 배고픔보다는 너의 배고픔을 먼저 생각했고, 내 추위보다는 너의 추위를 먼저 걱정했기 때문에 고사인쿤드 호수 앞 우리는 모두 천사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정확히 무엇이라고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이 세상과 시간, 공간의 경계와 단절을 모두 뛰어 넘은 순간의 경이로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고사인쿤드가 나에게 준 선물 같은 찰나였다.
그렇게 우리는 랑탕 트레킹의 대미를 장식했다. 다음 날 우리는 거의 수직강하 하듯 산을 내려왔고, 둔체(Dhunche)에서 카트만두로 돌아가기 전 트레킹의 마지막 밤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더운 물에 개운하게 씻고 8명이 모두 무사히 건강하게 트레킹을 마친 것을 감사하며, 다같이 모여 앉았다. 곧 헤어짐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잊으려는 듯 지나간 시간만 곱씹었다. 아쉬운 시간의 흐름 속에 나는 준비했던 선물을 꺼내 놓았다. 얼마 전부터 여행을 할 때, 스쳐 지나는 인연들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해주고 싶어 내 연락처와 간단한 인사말이 적힌 엽서를 만들어 가지고 다녔다. 엽서의 뒷면에는 그 때 그 때 그림을 그려 선물할 수 있었다. 지난 밤, 난롯가에 앉아 미리 세 명의 네팔 친구들의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을 그려 두었고, 나는 그것을 수줍게 건넸다.
“세상에, 이걸 언제 그렸지? 랑탕 마을에서 그림을 그릴 때부터 나는 애니 네가 예술가라고 생각했어.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남자 중의 남자라 강해 보이고 터프한 테게Tek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한테 그림을 그려준 건 네가 처음이야. 내 여동생이 짜 준 목도리를 한 모습을 또 다른 내 여동생이 그려 주었네. 애니 너는 내 여동생이나 다름없어.”
그는 내 두 손을 꼭 맞잡아 주고는 선물을 가슴 속에 고이 품고 방으로 들어갔다. 노빈Nabin과 쿠마르Kumar도 그림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는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내가 좋아서 그린 그림이 너희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어 내가 더 고마워. 소중하게 생각해 주어서, 진심으로 고마워 해줘서, 나야말로 정말로 고마워.’
나도 모르게 역시 가슴이 먹먹해져 우리의 마지막 밤, 나는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다시 로컬 버스를 타고 카트만두로 돌아갔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부려놓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해 함께 하며 우리는 정식으로 우리만의 해단식을 했다. 고산병 걱정 안하고 배부르게 실컷 먹고 마시다가 갑자기 노빈Nabin이 선물이라며 꺼낸 행운을 기원하는 카타(Khata)에 멈칫했다. 선물 증정식이 테게Tek와 쿠마르Kumar까지 이어져 내 목에 카타 세 개를 걸치고는 결국 또 눈물이 터졌다. 짧다면 짧았던 12일의 시간 동안 어떻게 그렇게 정이 많이 들었는지 진짜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싫어 그 순간을 부여잡고 싶었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잊고 싶었다. 잠깐의 시간에 우리를 생각하며 준비했을 그들의 마음 가득한 선물을 목에 휘감고 있노라니 이제 진짜 형제 같은 친구가 된 듯한 기쁨과 곧 이어질 헤어짐이 세상을 다 잃은 듯 아쉽고 슬픈 마음이 공존해 치밀어 올랐다. 서로를 기억하기 위해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국적불명의 노래를 함께 부르며 신나 하는 우리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꼭 에베레스트 정상이라도 밟고 온 사람들 같다며 놀리셨다.
에베레스트 정상이 대수랴. 우리에게는 천금을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우리만의 시간이 있다. 그들은 나에게, 나는 그들에게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지만,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이제는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그러한 억겁의 인연의 실이 쌓이고 엉켜 찬란한 내 삶의 조각을 기워내고 있으니. 아직도 문득 생각이 난다. 랑탕 계곡에 울려 퍼지는 뜻 모르는 우리의 노랫소리가. 입가에 미소 가득 퍼지게 만드는 그 노랫소리가.
“칸치 라이 굿모닝 카트만두 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