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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hdainy Jan 24. 2024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이민진, 2007

2024년 1월 1일부터 1월 23일까지 읽다. 

 <파친코> 를 통해서 아주 좋아하게 된 이민진 작가의 장편 첫 작품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을 읽었다. <파친코> 를 읽고 작가의 글쓰는 방식에 매료 되었지만 이 데뷔작을 읽어볼 생각은 딱히 하고 있지 않았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이민진 작가를 좋아하는 친구가 SNS에 올린 이 책의 프롤로그 일부를 보고 난 뒤 중고 서점에서 1권과 2권을 한번에 구매해서 책 읽기를 시작했다. 한 권당 500페이지에 이르는 책 두 권을 읽다보니 체력이 달려서 종종 낮잠을 청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속도감 있고 즐겁게 책장을 넘겼다. 


 이 소설은 인물중심적으로 서술된다. 인물이 가진 학력, 사회적 위치, 집안의 배경, 소비 습관과 대인 관계를 통해서 사건이 발생하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사건들도 각 인물들이 지닌 계층적 속성을 보여주는 장치에 가깝고 각 인물의 캐릭터성만큼 중요한 역할을 해내지는 못한다. 이민자들과 이민자들의 자녀들이 대부분의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의 개별 캐릭터는 당황스러울만큼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솔직히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밝힌 의도를 읽지 않았다면, 마치 본인이 학교 생활을 하며 관찰한 가장 잘 나가는 친구들을 등장 인물로 한데 모아 놓은 2000년대 식 인터넷 소설을 읽는 것같은 기분을 선사하는 인물들이었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말하길, 미국 사회에서 2등 시민일 수 밖에 없는 이민자들이기에 그 핸디캡을 상쇄할 만큼의 매력 (외모, 직업, 취향, 성격 등) 을 각 캐릭터에게 부여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매력적인 이들이 겪는 일련의 일들이 그들이 빠져 나오기 힘든 커다란 사회 구조를 보여줄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이해했다. 


 이 소설은 명백하게 미국 사회의 한국인 이민자 1세대와 2세대의 이야기이다. 내 주변에 한국인 이민자는 없지만, 이민자들과 정체성이 비슷한 미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 소설이 속한 문학적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 의 기본적인 서사는 단순히 작품적인 해석을 넘어서 생생한 경험담과 그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행동 양식과 사고 방식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이유 때문인지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을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았고, 내가 아는 이들의 얼굴이 특정 장면들에서는 여러번 겹치곤 했다.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레 감정 이입을 한 이유도 있겠지만, 케이시의 모습에서는 자주 나를 발견했다. 나는 이민자도 아니고, 미국에서 학창 시절이나 경제 활동을 경험한 적도 없지만 케이시가 갖고 있는 중간자적 모습, 일종의 회색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깊게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케이시라는 사람의 자아를 형성 하는 수많은 역사들은, 미국 사회에 노동자 계층의 이민자로서 살아온 부모를 둔 한인 2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도 언급한대로, '부모와 다른 눈부시고 화려한 인생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녀의 욕망, 수치심, 갈망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평범한 샐러리맨 아버지를 두고 서울 변두리 지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후,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위해 친척 어른의 도움으로 서울의 전통 부촌으로 이주(난 이걸 이사가 아닌 이주 라고 부른다. 단순한 거주 공간의 변화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송두리째 달라지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한 뒤 학창시절을 보내고, 마침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여 명문대에 진학, 외국계 기업 취업이라는 지난 30년 간의 나의 역사 또한 충분히 '케이시'적이다. 내가 갖고 태어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갖고도 그것들이 본인의 삶을 어디까지 이끌어 줄 수 있는지 자각하지도 않아도 될만큼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면서 체득한, 항상 어딘가 +1으로 껴 있는 듯한 그 느낌.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교복을 입고, 학원을 다니고, 손을 잡고 졸업 사진을 찍고, 수강 신청을 하고, 회사를 다니며, 업무가 끝난 후에는 한 잔에 3만원이나 하는 비싼 칵테일 바에 가서 술 한잔을 기울이더라도, 그 모든 과정에서 나는 온전히 나로 존재하기 보다는 그들 모습의 일부를 흉내내고 있거나, 흉내내는 내 자신을 경멸하고 급기야는 행복한 망각을 누리는 그들의 특권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알량한 정신적 우월 의식을 갖기도 했다. 


 케이시가 겪는 부모와의 갈등, 진로에 대한 비이성적인 결정, 남성을 대하는 태도, 터무니 없는 경제 관념, 겉모습에 대한 집착과 허세, 이 모든 면에서 나를 발견했고, 지독히도 까발려지는 기분과 더불어 끝내는 그녀를 안아주고 싶다는 화해와도 같은 감정이 올라왔다. 작품에서 모자는 케이시가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사회적 계층, 그녀가 타인에게 전시하고 싶지만 아직은 갖지 못한 자아상,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대물림 되는 계층 상승적 기대를 벗어난 진정한 자기 만족과 자아 실현을 상징한다. 나와 무척 닮았음에도 내 옆에 있는 친구였다면 의사 결정 순간들마다 곁에 가서 꿀밤을 쥐어 박고 싶을만큼 어이없는 결정만 골라하는 케이시가 마지막에는 결국 본인 욕구를 솔직하게 받아 들이고 모자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을 하며 마무리 지을 수 있어서 기뻤다. 


 그 외 인물들도 여러모로 과장되게 그려지기는 했지만 하나의 공통된 지향점이 있다면 각자의 삶에서 생득적으로 짊어 질 수 밖에 없는 특정한 역할을 비껴나서, 개인으로서의 욕망에 솔직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굉장히 미국적이고 (동의어 반복같지만) 희망적이다. 성공한 이민자 2세의 전형인 테드 김이 사랑하는 백인 여성인 델리아에게 가기 위해 완벽한 아내인 엘라를 버리는 것, 세상에서 가장 얌전한 한인 아가씨인 엘라 심이 이혼 후 본인 감정에 솔직해져서 직장 상사인 백인 데이비드와 재혼하는 것, 결말이 다소 기독교적인 형벌로 나타나긴 했지만 평생을 순종적인 아내로 살아온 리아가 흠모하던 지휘자 찰스를 통해서 자신 안의 욕망을 깨닫는 것, 가난한 배경에서 노력하여 엘리트 사회에 편입한 제이가 본인과 비슷한 배경을 가져서 동질감을 공유했던 케이시와 헤어지고 같은 아시아계지만 부유한 게이코와 결혼하는 것, 부족할 것 없는 집안 출신이지만 내키지 않는 일을 하면서 겉모습만 그럴 듯한 공허한 인생을 살던 은우 심이 진정으로 자신의 공허를 깨닫고 스스로를 회복하게 되는 것. 원세계에서의 마찰을 전투적으로 감수하면서 택한 각 인물들의 선택에 때로는 눈물이 났고 분노 했으며, 도합 1,000 페이지에 이르는 책장 마지막을 덮을 때는 이들이 모두 결국엔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기복적인 마음이 되었다.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이나, 사건의 속도와 개연성 측면에서 내가 아주 선호하는 스타일의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특유의 투박함 때문에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이 더운 숨을 뱉어 내는 진짜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한번 본 소설을 다시 펼쳐 보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이 작품은 긴 시간동안 가끔 찾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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