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마리아의 외모가 빼어나냐고 묻는다면 다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을 것이다. 젊은 사내들이 밭의 끄트머리에 서서 길가를 힐끗거리며 마리아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이유는 그녀의 곱슬거리는 금발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함이었다. 어떤 사내들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햇빛의 향기가 난다고도 했다.
마리아가 굳이 길을 돌아서 밭을 지나쳐 가는 이유는 세바스티앙 때문이었다.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자 마리아는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세바스티앙 쪽으로 눈길을 줬다. 수줍은듯했으나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세바스티앙은 마리아를 바라보는 눈길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정중하고 순수했다.
어느 날 세바스티앙은 마리아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사랑을 고백했다. 세바스티앙의 떨리는 목소리가 마리아의 마음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마리아의 빛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세바스티앙뿐이었다.
세바스티앙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테니 자신과 같이 떠나자고 마리아를 설득했다. 남자의 야망에 못 이겨 따라나섰다가 고향으로 돌아올 면조차 챙기지 못한 여자들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바스티앙에게는 그들과 다른 것이 있었다. 마리아에게 확신을 주는 눈빛. 마리아는 절대적으로 세바스티앙을 믿었고 그녀의 어머니조차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2. 도시로 간 연인
도시는 세바스티앙의 야망보다 컸고 공장은 그의 눈빛보다 더 뜨거웠다. 도시에서 마리아의 금발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하지만 둘은 여전히 사랑했고 희망이 있었다. 그들이 품은 희망은 아이로 증명되었다. 임신한 마리아는 몸이 부어오자 더 이상 일을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고향에 있던 어머니가 딸을 돌보기 위해 도시로 왔다.
푼돈이지만 어머니가 가져온 돈은 세바스티앙 부부의 살림에 보탬이 됐다. 하지만 마리아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만삭이 다 되었을 때는 신던 신발도 맞지 않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조금 큰 슬리퍼를 사서 위태롭게 부은 마리아의 발에 신겨주었다.
얼마 후 마리아는 자기를 닮아 금발의 머리가 곱슬거리는 여자아이를 낳았다. 신들에게 보호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셀마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마리아는 세상을 떠났다. 셀마의 할머니는 마리아를 대신해 셀마를 돌보기 위해 도시에 정착했다.
세바스티앙은 하루에 10시간이 넘도록 일을 하다 보니 항상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셀마가 자는 모습을 보며 아이의 평화를 끝까지 지켜주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셀마는 시커먼 아버지의 손이 낯설었고 하얀 눈동자만 번뜩이는 얼굴이 무서웠다.
"아빠가 셀마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 보니 그런 거란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노고를 셀마에게 늘 얘기했지만 셀마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도시의 매캐한 연기와 공장의 매연으로 검푸른 하늘은 할머니에게 특히 독이었다. 할머니의 기침은 날로 심해져 식사조차 편히 할 수 없었다. 셀마는 본능적으로 할머니의 기침에서 위험을 직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이제 셀마에게는 세바스티앙만 남았다.
세바스티앙이 성냥공장으로 일을 하러 간 사이 셀마는 할머니의 행동을 눈동냥으로 본 대로 살림을 꾸려갔다.
집으로 돌아온 세바스티앙은 자고 있는 셀마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가만히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가끔 셀마는 잠들지 않았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3. 사람 죽이는 성냥
아무리 공장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았다지만 공장의 어두운 면까지 감당하는 것은 벅찼다. 성냥의 주원료인 백린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치통을 호소하는 것을 시작으로 치아를 뽑다가 턱까지 망가지는 끔찍한 질병이었다. 지난주에는 공장에서 오래 일했던 카리나가 치아를 뽑으려다 턱뼈도 같이 뽑혔다는 얘기를 들었다.
며칠 전부터 세바스티앙에게도 질병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바스티앙은 치통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세바스티앙의 사정을 알고 있는 관리인은 척박한 도시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연민을 발휘해 세바스티앙을 눈감아줬다. 게다가 세바스티앙은 묵묵히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 섣불리 자를 생각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바스티앙도 참을 수 없는 치통을 느꼈고 두 개의 치아를 뽑았다.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기 위해 동료로부터 경험이 있다는 사람을 추천받아 치아를 맡겼다. 하지만 오히려 수술 과정에서 감염되어 통증이 더 심해졌다. 세바스티앙은 술을 진통제처럼 마시기 시작했다.
점차 술이 늘기 시작하더니 하루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통증을 참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버렸다. 쓰린 속을 달래는 방법을 몰라 점점 예민해진 세바스티앙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짜증을 뻗쳤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셀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
술에 상한 속을 게워내는 일이 잦아졌고 업무 속도도 느려졌다. 밖에는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수많은 세바스티앙이 있었다. 공장 관리인은 조용히 세바스티앙을 불렀다. 그리고 내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나오지 말라고 했다. 세바스티앙은 관리인의 팔을 붙잡으며 술을 끊겠다고 호소했다.
"그만 집으로 가시오."
관리인은 이 말만 남긴 채 공장으로 돌아갔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세바스티앙에게 모아놓은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세바스티앙은 머리 매무새를 가다듬고 그나마 깨끗한 물을 구해 세수를 했다. 술냄새가 달아날 때까지 옷을 거칠게 털었다.
그가 찾아간 곳은 공장이었다. 관리인의 점심시간에 맞춰 공장 입구에서 기다리던 그는 관리인이 나오자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관리인은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내뺐지만 세바스티앙인 것을 알고는 주춤했다. 세바스티앙은 새는 발음으로 관리인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사정했다. 관리인은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만 반복했다. 세바스티앙에게서 찌든 술냄새가 나기는 했으나 술을 마시고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관리인과 말이 통하지 않자 세바스티앙은 셀마의 이름을 들먹이며 동정심에 호소했다. 관리인도 셀마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몸이 망가져가는 알코올 중독자의 어린 딸.
"잠깐 기다려보시오."
관리인은 공장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후 돌아와서는 세바스티앙에게 보따리 하나를 건넸다.
"모양이 불량으로 나왔을 뿐 기능에는 문제가 없는 성냥들이오. 이거라도 가져가서 저렴한 값에 팔아보시오."
관리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가던 길을 갔다. 세바스티앙은 가만히 손에 쥔 보따리만 내려다봤다.
세바스티앙은 거리로 나가 성냥을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술냄새가 지독한 사람에게서 성냥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며 대놓고 코를 막고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사람들의 멸시를 온몸으로 겪은 세바스티앙은 더욱 신경질적이 되었고 난폭해졌다.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힐끗 보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소리를 지르는 일도 있었다.
여느 날과 같이 한 푼도 벌지 못한 세바스티앙 앞에는 셀마가 앉아있었다. 셀마의 배는 눈치 없이 빈속을 달래려 소리를 냈다. 세바스티앙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는 셀마 앞에 성냥 보따리를 던졌다.
"그렇게 배고프면 네가 나가서 팔아와."
셀마가 어찌할 줄 모르자 그는 벽에 걸려있던 낡은 앞치마 하나를 보따리 위에 던졌다. 셀마는 잠시 세바스티앙의 눈치만 보다가 앞치마를 두르고 보따리에서 성냥 한 움큼을 꺼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잘못하면 앞치마를 태워먹을 수도 있어."
세바스티앙이 건넬 수 있는 유일한 경고이자 애정이었다.
셀마는 낙엽이 수북한 거리를 서성였다. 발에 맞는 신발이 없어 엄마의 슬리퍼를 신었다. 어떻게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주저하던 셀마는 작은 소리로 외쳤다.
"성냥 사세요."
작은 손에 성냥을 꼭 쥔 채 한참을 서있었는데 어떤 부인이 오더니 셀마에게 상냥하게 성냥 한 개비에 얼마인지 물었다.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가격을 말하자 부인은 셀마의 손에 돈을 쥐어준 뒤 성냥을 한 움큼 가져갔다. 셀마에게서 성냥을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아이가 있을 법한 나이의 부인이나 신사였다.
셀마는 해가 지기 전 집으로 돌아와 세바스티앙 앞에 남은 성냥과 벌어들인 돈을 내려놨다. 세바스티앙은 깜짝 놀라며 셀마를 바라봤다. 그날 이후 성냥을 파는 일은 자연스럽게 셀마의 몫이 되었다. 셀마가 돈을 가져오면 세바스티앙은 그 돈으로 빵 한 덩이를 사 셀마에게 주고 자신은 술을 마셨다.
하지만 매번 셀마가 돈을 벌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빌어먹을'이라고만 말하던 세바스티앙은 셀마가 며칠에 걸쳐 푼돈만 벌어오자 자신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셀마에게 손찌검을 했다. 셀마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붉은 얼굴의 세바스티앙은 자신의 행동에 충격을 받아 그대로 손이 굳어버렸다.
세바스티앙이 처음 손찌검을 했던 그날 밤, 그는 집을 나가 밤이 다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셀마는 아버지에게 맞았다는 사실보다도 홀로 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더욱 공포스러웠다. 이후 세바스티앙이 셀마에게 손찌검을 하는 날이 많아졌으며 세바스티앙도 점차 죄책감을 잃어갔다.
4. 슬리퍼 위에 버려진 아이
그 아이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다. 갓 태어났을 때도 아이의 체구는 또래보다 훨씬 작았다. 멀쩡한 체구의 아이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는 시대였다. 그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울 능력도 되지 않았기에 더 키워볼 생각도 없었다.
제대로 몸도 추스르지 못한 여자는 후미진 골목에 아이를 놔두었다. 아이를 등지고 돌아서려다 마음에 걸렸는지 그녀는 신고 있던 슬리퍼 한 짝을 벗어 그 위에 아이를 뉘었다. 아이의 몸은 너무 작아서 슬리퍼에 폭 들어갔다. 그것이 그녀가 보여준 마지막 모성애였다. 아이 대신 자신이 차가운 땅을 밟는 것.
하지만 그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은 아이의 엄마가 밟았던 땅보다 훨씬 더 차갑고 냉정했다. 얼마 안 가 죽을 거라던 예상과 달리 아이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아이는 한 부랑자의 눈에 띄었다. 그는 아이를 부랑자 소굴로 데려갔다. 그들이 그 아이를 키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곁에 뒀을 뿐 아이는 스스로 컸다. 소굴의 사람들은 그 아이를 슬리퍼라는 뜻의 '투플러'라고 불렀다. 아이는 그 별명이 싫었지만 반항하기에는 자신의 체구가 너무 작았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투플러는 다른 부랑자 아이들과 함께 부자들이 산다는 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새해 전야는 항상 정신이 없었고 사람들이 선물을 사기 위해 현금을 두둑하게 가지고 나오는 날이었다. 자신보다 몸집이 큰 아이들은 대범하게 현금을 훔쳤으나 투플러에게는 그런 배짱이 없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한참 거리를 노려보는데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한 소녀가 성냥을 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추위로 꽁꽁 언 손을 다 찢어져가는 앞치마에서 꺼내더니 거리의 사람들에게 성냥을 한 움큼 쥐어 보였다. 그날따라 거리에서 시가를 태우는 남자들도 없었다. 다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러 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어느새 투플러의 시선은 소녀의 발로 향했다. 누가 봐도 소녀가 신기에는 너무 큰 신발, 성인 여성의 슬리퍼였다. 순간 투플러는 가슴을 찌르는 통증을 느꼈다. 자신이 요람 삼아 누워있던 슬리퍼가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슬리퍼는 자신을 데려 온 부랑자가 팔았거나 술과 바꿨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성인 여성의 슬리퍼만 보면 화가 나고 가슴에서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때 소녀가 넘어지면서 신고 있던 슬리퍼가 날아갔다. 투플러는 무의식적으로 소녀에게 달려가 슬리퍼 한 짝을 낚아채 달아났다. 소녀가 허망하고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를 봤다. 그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려고 했으나 자신도 모르게 분노를 담아 말했다.
"나중에 아기가 생기면 요람으로 쓸 거야."
투플러는 냅다 달렸다.
그는 자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아이를 낳으면 절대 슬리퍼 위에다가는 버리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아이의 이름이 슬리퍼가 되는 일은 없게 할 거라고 매일 다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다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났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아이의 볼을 할퀴었다.
5. 성냥을 파는 소녀
셀마는 날아간 슬리퍼의 다른 한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찬바람으로 부르튼 맨발로 눈을 밟았다. 추위에 몸을 떨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지만 어김없이 몸이 떨렸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몸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거리에 만연한 거위구이 냄새가 셀마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셀마는 여느 때처럼 성냥을 팔고 있었고, 이대로 성냥을 다시 들고 집으로 갔을 때 마주할 아버지가 공포스러운 것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셀마가 창문을 통해 본 번듯한 집안의 풍경은 달랐다.
치맛자락에서 바스락 소리가 날 것만 같은 부인이 크리스마스트리 위에 놓인 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커다란 거위 구이가 놓여 있었고 한쪽에서는 난로가 활활 타올랐다. 아이들은 설레는 표정으로 거위구이를 바라봤다. 부인이 기다란 칼을 건네자 남자는 거위구이를 큼지막하게 잘라 아이들 접시에 놔주었다.
셀마는 마른침을 삼키며 바람을 피해 집과 집 사이 좁은 모퉁이에 웅크린 채 앉았다. 가까스로 거센 바람은 막았으나 여전히 추위에 몸이 떨렸다. 셀마는 손에 꽉 쥐고 있던 성냥 더미에서 하나를 꺼내 벽에 그었다. 성냥은 화르륵 소리를 내더니 붉은빛을 키웠다. 성냥의 불꽃은 창문 너머로 본 난로와 닮아 있었다.
불꽃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불꽃이 사라진 후 마주한 벽은 전보다 더 차가워 보였다. 셀마는 성냥개비를 하나 더 꺼내 또다시 벽에 그었다. 일렁이는 불빛 사이로 번듯한 집의 식탁이 보였다. 하얀 식탁보 위에 금테를 두른 접시가 놓여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거위 구이가 놓여 있었다. 기다란 칼을 든 남자가 거위구이를 썰더니 가장 큰 조각을 셀마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셀마가 입맛을 다시는 순간 불이 사라지면서 거위구이도 사라졌다.
셀마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슬퍼서 흐르는 눈물인지 모퉁이를 돌아 들어온 찬바람에 흐르는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셀마는 성냥개비 하나를 더 그어 불을 피웠다. 바스락 거리는 치맛자락의 부인이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부인이 고개를 돌리자 놀랍게도 셀마의 할머니였다.
"할머니."
불꽃이 작아질 때마다 셀마는 성냥개비를 하나씩 꺼내어 불꽃을 이어갔다. 할머니가 셀마를 보며 미소 짓자 셀마도 따라 미소 지었다. 불꽃이 사라지기 전에 셀마는 눈을 감았다.
6. 무심한 새해
헨릭은 더부룩한 배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지난밤 너무 많은 거위 고기를 먹은 탓이었다. 게다가 술까지 마셨으니 고기와 한 데 뒤섞여 소화를 방해했다. 헨릭은 새해의 첫 일출을 보기 위해 창문에 바짝 붙어 섰다. 커튼을 젖히니 저 멀리 여명이 밝아오는 것이 보였다. 올해도 사업이 잘 풀리길 기도했다.
해는 금방 자리를 잡았다. 이제 창문에서 떨어지려는데 집 모퉁이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려고 창문을 열었더니 찬바람이 휑하고 들어왔다. 아직 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아내가 뒤척였다. 헨릭은 조용히 외투를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에는 소녀 하나가 맨발로 누워있었다. '집을 태웠으면 어쩔 뻔했어요?' '가엾어라.' '얼어 죽은 건가?' '성냥에 취한 거 아니야?'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소녀의 온몸은 꽁꽁 얼어 있었다. 주변에는 타고 남은 성냥이 널려 있었다.
헨릭은 지난밤을 떠올렸다. 가족들과 만찬을 즐겼던 저녁식사를,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넘쳤던 시간을, 부인에게 잘 먹었다며 건넨 키스와 미소를. 그의 시선이 소녀의 얼굴로 향했다. 소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 있었다.
곧 경찰이 도착했다. 경찰은 사람들을 물러 세우고는 들것에 소녀를 실었다. 헨릭이 떠나려는 경찰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무슨 일입니까?"
헨릭은 외투를 벗어 소녀에게 덮어줬다.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 눈으로 헨릭을 바라봤다. 경찰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혹시 아시는 아이입니까?"
"모르는 아이입니다."
경찰은 헨릭의 표정을 살피고는 말했다.
"선생님, 마음은 알겠으나 아이는 이미 지난밤에 동사했습니다. 외투는 필요 없습니다."
경찰이 외투를 걷어내려고 하자 헨릭이 지그시 외투를 잡았다.
"지난밤에 필요했겠죠."
경찰은 헨릭과 주변 사람들을 번갈아 보더니 그대로 들것을 들고 떠났다.
헨릭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그와 함께 소녀를 애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집 앞에서 죽은 소녀를 발견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헨릭이 집으로 들어가자 쑥덕대던 사람들도 흩어져 제 갈 길을 갔다. 새해의 첫날은 다시 무심하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