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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Sep 21. 2023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혼자 보내는 밤

어두운 밤이 되면 낯설어지는 곳

어렸을 때는 언니와 2층 침대에서 같이 잤다. 자기 전에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장난치다가 싸우기도 하며 늦은 밤에도 부지런이 추억을 쌓았다. 그러다 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각자 방을 가다. 나만의 방이 생긴 것은 좋았지만 혼자 자는 것은 여전히 무서웠다. 눈을 감았다 뜨면 아침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10까지 세고 다시 눈을 떠도 여전히 깜깜한 밤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혼자 자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거의 매일 밤 엄마와 같이 자고 싶다고 떼를 썼다.

떼를 쓰는 나를 혼내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던 엄마께서 어느 날 제안을 하셨다. '잠들기 전부터 안방으로 와서 엄마 옆에 눕는 것은 안 된다. 일단 혼자 잠들고 자다가 깨서 무서우면 옆으로 와서 자도 좋다.' 나는 꾀를 부려 엄마께서 잠드시기 전까지 깨어 있다가 잠드셨을 때쯤 베개를 들고 안방으로 갔다. 처음에는 엄마께서 흔쾌히 재워주셨으나 어린아이의 잔머리는 금세 들통이 났다. 결국 나는 베개를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엄마께서는 혼자 자는 버릇을 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내 방에서 잠드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셨다. 그 후부터는 거의 매일 밤 내가 잠들 때까지 침대 옆 책상에 앉아 책을 읽으다.




책을 읽고 계시는 엄마의 뒷모습을 확인하며 잠들던 나는 엄마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꽤 오랫동안 혼자 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언니가 샤워하는 동안 언니 침대에 들어가서 이미 잠들어버린 척할 정도로 누군가와 살을 맞대고 자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혼자 자는 것에 익숙해졌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서히 일어난 변화였다. 하지만 천둥과 번개가 요란한 밤에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엄마 옆을 비집고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엄마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져서 잠이 잘 왔다.

자취를 결심했을 때만 해도 나만의 완전체 공간이 생긴다는 것에 들떠 혼자 자는 것이 어떨지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유난히 바쁘지도 피곤하지도 않았던 어느 밤, 매일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문을 열고 나가면 두려움을 덜어줄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를. 그런 날에는 평소보다 눈 말똥말똥하고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진다. 샤워 호스를 거치대에 걸어놓는 소리마저도 환풍구를 통해 생생하게 들리고 옆집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는 흠칫 놀라기도 한다. 정신을 다른 데 집중시키기 위해 음악을 틀어놓고 자기도 하고 겨울에는 벽난로의 장작 타는 소리를 틀어놓기도 했다.




혼자만의 밤이 늘 무서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밤의 매력에 마음을 기울이기도 한다. 밤이 되면 거리의 소리가 위로 올라 창문을 넘어 방으로 들어온다. 소리에 예민한 나는 숙면을 취하기 위해 창문을 꼭 닫고 잘 때가 많지만 가끔은 바깥을 울리는 소리가 백색 소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자동차가 덜컹거리며 방지턱을 넘어가는 소리, 갑자기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무언가가 보도블록을 긁는 소리 등. 새벽 두 시면 쓰레기 수거차가 와서 쓰레기를 수거해 가는 것도 늦은 밤 깨어 있을 때 알게 됐다.

늦은 오후에 커피를 마시는 날은 으레 잠이 오지 않고 어떤 날은 아무 이유 없이 잠이 안 오기도 한다. 대체로 다음 날 출근을 생각해서 몸을 뒤척이며 꾸역꾸역 잠을 청해 보지만 출근을 앞두지 않은 밤에는 굳이 잠을 자려 애쓰지 않는다. 과감하게 잠을 포기하고 좀 더 재밌는 놀거리를 찾는다. 달밤에 음악을 들으며 어둠 속에서 나 홀로 춤을 추기도 하고 침대 옆에 놓인 스탠드만 켠 채 늦게까지 영화를 보기도 한다.




늦은 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자취방을 바라보면 방 한 칸뿐인 공간이 유난히 넓게 느껴진다. 블라인드를 치지 않을 때는 창밖에서 들어오는 생활 불빛이 방 안 어슴푸레하게 밝힌다. 눈이 어둠에 적응되면 형체만 보이던 것들이 뚜렷해진다. 어둠 속에서는 늘 쓰던 물건 마치 마법에 걸린 듯 낯설어가만히 바라보며 내가 알고 있는 물건이 맞는지 확인한다.

나의 공간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늦은 밤이면 되살아나던 공포는 사라지고 이 집이 내가 자는 동안 나를 지켜준다는 생각이 든다. 눈을 감고 잠이 오기를 기다리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떠다니다 불쑥 현실로 넘어올 때면 눈이 번쩍 떠진다. 나를 품고 있던 집은 내가 다시 잠들 수 있도록 평온한 공기를 내뿜으며 나를 다독인다. 그럼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아침이 될 때까지 고요한 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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