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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Sep 20. 2023

시리얼이 주식이던 내가 미역국을 끓이다

요리의 재미를 알게 되다


자취는 처음이지만 부모님과 떨어져서 혼자 살림을 해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한 학기 동안 교환학생으로 지내면서 처음으로 독립생활을 해봤다. 사실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던 데다가 3명의 룸메이트도 있었기 때문에 완벽한 독립생활은 아니었지만 이런 경험 또한 처음이었기에 내게는 의미가 있었다. 룸메이트는 금요일 저녁이면 빨래를 짊어지고 본가로 돌아갔다가 월요일 아침이면 양손 가득 부모님이 해주신 요리를 들고 돌아왔다. 한 번은 룸메이트의 어머니께서 기숙사로 오셔서 직접 냉장고에 음식을 넣어주시다가 내 음식이 들어있는 칸을 보고 깜짝 놀라셨다. 1리터짜리 우유 두 병과 계란, 치즈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룸메이트의 어머니께서는 이렇게만 먹어서는 안 된다는, 우리 엄마께서 보셨더라도 했을 만한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하셨다.

 

교환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나의 식단이 형편없었던 것은 인정한다. 나의 주식은 시리얼이었기 때문에 냉장고에는 우유가, 부엌 찬장에는 시리얼이 끊기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기 위해 간편 야채와 계란을 사다가 간단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냉동실에 쟁여둔 냉동 감자튀김 1킬로와 장 보러 갈 때마다 조금씩 사다 나른 1유로짜리 맥주 별미였다. 그때의 나는 맛집을 찾아다니기보다는 같은 가게에서 같은 메뉴를 먹는 편이었다. 난생처음 발을 디딘 유럽에서 나를 설레게 했던 것은 다양한 음식과 식재료가 아니라 오래된 거리와 박물관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6개월도 되지 않았던 교환학생과 자취는 차원이 다르다. 그때는 일주일에 겨우 두 번 4시간씩만 수업을 들었지만 지금은 주중 내내 8시간씩 일하기 때문에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하고 스트레스의 강도도 높다. 무엇보다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자취생활이기에 대충 때우다가는 잘못된 습관이 들 수 있다. 서른이면 서른답게 인생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외부 음식에 의존하기보다는 내 손으로 직접 만드는 연습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내 손으로 해 먹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취 초반에는 파스타를 자주 해 먹었는데 시판된 소스에 새우와 파슬리만 추가하면 멋들어진 한 접시를 완성할 수 있었다.


간단한 한 그릇 음식만 해 먹던 어느 날 갑자기 미역국이 먹고 싶어졌다. 워낙 미역국을 좋아해서 축하할 일이 없어도 엄마께서 자주 해주시고는 했는데 자취를 시작하면서 단 한 번도 먹지 못했다. 미역국 조리법을 검색해 보니 조미료를 사용하는 레시피가 많았다. 조미료를 사용하면 요리가 훨씬 쉬워지겠지만 어쩐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만들었다고 내 입맛에 맞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일찍이 깨달았지만 간장과 소금으로만 맛을 내보기로 도전했다. 그 결과 예상외로 그럴듯한 미역국이 완성되었다.




날이 갈수록 요리 부심이 강해졌지만 여전히 나물처럼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은 부모님 댁에서 받아온다. 엄마께서는 듬뿍 담아가라고 하시지만 나는 제일 작은 반찬통을 꺼내온다. 주중 점심은 회사 근처에서 사 먹고 저녁으로는, 교환학생 때의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 시리얼로 가볍게 먹을 때가 많다 보니 집에서 밥을 먹는 날이 많지 않다. 집에서 밥을 먹는 날이라곤 주말뿐인데 제일 작은 반찬통에 담아 가도 서너 주 동안 먹기 때문에 혹시라도 상할까 봐 욕심내서 가져오지 않는다.


상할까 봐 아예 집에 갖다 두지도 않는 것이 반찬뿐만은 아니다. 쉽게 물러 버리는 과일은 선뜻 구입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다 과일 특유의 상큼함이 간절하게 그리웠던 날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해 30프로 세일하는 씨 없는 포도 한 송이를 사 왔다. 보관하지 않고 당일에 다 먹어버리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먹기 시작했는데 먹다 보니 금방 배가 불렀다. 하지만 남기면 버릴 것 같아서 앙상한 가지만 남을 때까지 깨끗이 먹었다. 이제는 무리해서 과일을 먹는 짓은 하지 않고 비교적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오렌지나 바나나를 먹는다.




얼마 전, 본가에 가서 엄마와 얘기를 하던 중 내가 이제까지 해본 요리 사진을 보여드렸다. 엄마께서는 요리 자체의 퀄리티보다도 내가 사진 속 요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셨다. 바르셀로나에서도 시리얼만 먹었는데 이젠 어엿하게 돈을 버는 직장인이니 전부 사 먹을 거라고 생각하셨다는 말씀을 듣고는 '다 사 먹으면 돈이 얼만데'라며 제법 살림꾼다운 알뜰함을 보였다.


회사를 오고 가는 것만으로도 유독 피곤한 날이 있다. 그런 날까지 지친 몸을 움직여 요리를 하지는 않는다. 본가에서 받아 온 반찬과 대량으로 사둔 김 한 봉지를 꺼내 먹곤 한다. 하지만 회사에서 짬이 날 때 새로운 요리 레시피를 검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예전과 너무 달라진 모습에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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