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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Sep 15. 2023

어서 오세요, 세상에서 하나뿐인 자취방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을 초대한 집들이

이사 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금요일 저녁, 퇴근 후 곧장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집안 구석구석 청소기를 밀고 화장실 바닥까지 박박 닦으며 금요일을 불태웠다. 예민한 눈초리로 청소를 하는 이유는 주말에 가족을 위한 집들이를 열기 때문이다. 자취 생활이 안정기에 들어서자 나도 누군가를 초대해서 내가 꾸며 놓은 공간을 자랑하고 싶었다.  이제 제법 손이 타서 집에 들어섰을 때 나던 향도 낯설지 않았고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던 그릇도 꺼내 쓰기 좋은 위치로 바뀌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성스럽게 만든 요리를 대접하고 싶었는데 가족들은 번거롭다며 한사코 말렸다. 결국 집 근처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그래도 디저트 정도는 직접 만들어 내놓고 싶어서 온라인몰에서 레드벨벳 컵케이크 믹스를 미리 주문해 놨다. 베이킹 믹스로 케이크와 브라우니는 만들어 본 적이 있어서 머핀도 비슷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레시피에 나와 있는 정량보다 물을 많이 넣었는지 걸쭉하지 않고 흥건했다. 믹스 가루는 이미 다 쏟아 넣었기 때문에 흥건한 채로 굽는 수밖에 없었다. 전자레인지에 몇 번씩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며 익었는지를 확인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부모님께서 서 계셨다. 번호키를 누르지 않고 문이 열리길 기다리시는 모습이 어딘가 낯설었다. 내가 문을 열고 직접 마중을 나간 적이 있던가? 어수선했던 이삿날의 모습에서 정갈하게 변한 공간이 부모님을 반겼다. 부모님께서는 오차 없이 계획대로 들어선 가구를 보시면서 어쩜 이렇게 딱 들어맞냐시며 치밀하게 치수를 재고 그에 맞는 가구를 찾아낸 것에 감탄하셨다. 결혼 전에도 독립생활을 해보신 적이 없셔서 그런지 한 사람만을 위해 꾸며진 공간을 부러워하시기도 했다. 예약 시간에 맞춰 식당에 도착하니 언니가 이미 도착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결혼해서 자주 못보는 언니까지 오랜만에 모여서일까 아니면 서투른 초보 자취생이 아닌 전문 셰프가 만든 요리를 먹어서일까? 맛있는 식사와 함께 대화는 유쾌하고 따듯하게 흘렀다.


심지어 커피까지 포장해서 가져온 덕분에 집에서 준비한 거라고는 물기 가득한 레드벨벳 컵케이크가 전부였다. 그래도 그중 일부는 먹을만해서 가족들이 하나씩 맛볼 수 있었다. 우리 집 여자들은 모이면 대화가 끊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발언할 타이밍을 잡기 위해 세렝게티처럼 기회를 엿봐야 한다. 겨우 한 달이 조금 넘었지만 혼자 살면서 전보다 말수가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예전의 페이스를 되찾아서 전투적으로 대화에 임했다. 해가 질 때쯤 가족들은 주섬주섬 갈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 찬 것이 좋아서 저녁까지 드시고 가시라 했지만 그럼 너무 늦는다며 벌써 코트를 입고 계셨다. 배웅하고 돌아오니 집이 더 고요하게 느껴졌다.




두 번째 집들이는 고등학교 친구들이었다. 고3 때부터 지금까지 자잘한 선택이든 일생일대의 결정이든 긴 시간 옆에서 지켜봐 준 친구들이기에 꼭 초대하고 싶었다. 둘 중 한 명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이고 다른 한 명도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한다. 이제는 아무도 부모님 댁에 살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지표가 됐다. 이번에도 내가 요리하지 않고 우리 동네에만 있는 피자 맛집에서 배달시켜 먹었다. 집구경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자리에 앉아서 겨울 동안 있었던 근황을 나눴다. 짧다면 짧을 수 있는, 겨우 계절 하나가 지나갔을 뿐이지만 각자의 전환점을 지난 우리는 하루하루가 전부 새로웠다.

나를 비롯해 자취하는 친구들에게는 자취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다니려고 지방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혹은 반대로 지방에 있는 학교에 다니려고 서울에서 내려갔기 때문에, 직장이 집에서 너무 멀어서 등. 그러나 한 친구만은 예외였다. 그 친구는 오로지 자취를 하고 싶다는 열망을 이루기 위해 부모님의 둥지에서 나왔다. 자취방으로 얻은 집은 부모님 댁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직장과 딱히 더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 자취를 시작하기 위한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친구들 중 독립이 가장 잘 어울리는 친구다운 결정이었다.

자취가 하고 싶어서 자취를 시작한 친구는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면서 자취가 필수가 되어버렸다. 자취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친구는 축하를 전하면서도 일 년은 지나야 가볼 수 있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친구의 아쉬움을 덜어주기 위해 영상통화로 랜선 집들이를 열었다. 친구네 집의 와이파이 신호가 약해서 중간중간 끊기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얼굴을 보며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호주에 있는 친구의 집도 처음으로 구경해 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 원래 갖춰져 있는 거라고는 했지만 쿠션 색깔마저 친구와 잘 어울렸다. 나는 세세한 부분까지 카메라를 가까이해서 보여줬고 꽤 비싸게 주고 마련한 그릇 세트를 선보이기 위해 야심차게 부엌 찬장을 열었다. 내게 약간의 정리벽이 있는 걸 아는 친구는 그릇 세트보다도 모든 컵의 손잡이가 한쪽 방향으로 맞춰져 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언니와 방을 같이 썼다. 놀이방과 공부방으로 구분 지어 장난감은 장난감대로 모여 있었고 책상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어두운 밤에 언니와 같은 방에서 잠드는 것은 좋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나의 것'을 갖고 싶었다. 자라면서 나만의 방을 갖게 되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정리정돈과 청소로 방을 깨끗이 가꿨다. 집에 친구를 초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깨끗이 정리해 놓은 것들이 흐트러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내 공간을 관리하는 것을 넘어서 사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지 내 공간에 다른 누가 들어오는 것 자체가 반갑지 않았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손님을 초대해 내 집을 소개하고 무언가를 내어주는 것이 기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보내는 시간이 편안하고 즐겁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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