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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Sep 19. 2023

마음 한 켠만 내어준 동네에서 산다는 것

나이 든 신도시에서 젊기만 한 도시로의 이주

서울이 고향이지만 서울보다도 본가가 있는 동네를 더 고향처럼 느끼는 이유는 30년 인생 중 25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사 가던 날 한참을 달리던 차 안에서의 기억은 여전히 또렷하다. '이사라는 것이 원래 이렇게 멀리 가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서울 한복판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 길게 느껴졌다. 그 당시 나는 초등학교에도 입학하지 않았던 어린아이였고 곧 도착할 도시는 새롭게 단장을 마친 지 10년도 되지 않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신도시였다.


아파트 한 라인에만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는 애들이 열댓 명이 넘었고 단지 내 놀이터는 매일 문전성시를 이뤘다. 중학교에는 학년마다 40명이 넘는 애들로 꽉꽉 들어차있는 반이 16개가 있었다. 내가 태어난 1992년도를 스스로 쁘띠(petit, 작은) 베이비붐이라 불렀는데 그 해는 1기 신도시가 입주를 받기 시작했던 해이기도 하다. 내 또래의 아이를 둔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도시를 친구로 만들어주려는 듯 신도시로 이끌렸다. 도시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던 우리에게 도시는 정말로 친구 같았다. 다만 우리의 시간이 성장이었던 반면 도시의 시간은 노화였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친구들과 몰려가서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고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찾았던 번화가의 가게들은 언제부턴가 폐업 세일을 하더니 며칠 뒤에는 테이프로 커다랗게 'X'표시를 붙였다. 저출산으로 어딜 가든 어린아이를 보기는 힘들다지만 젊은 세대의 독립으로 인해 빈 둥지 가구가 늘어갈수록 도시에서 청년마저 사라졌다. 명절 연휴에는 집을 비우는 사람보다 자식과 손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때서야 아이들의 말소리가 베란다 창 너머로 들렸다.


그렇다고 나이 든 도시가 쓸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바둑판식 배열의 넓은 도로라는 신도시만의 특징 위에 세월의 멋이 더해졌다. 30년 넘은 나무가 만들어낸 그늘은 신도시의 중심에 선 공원뿐만 아니라 도로 곳곳에 휴식처가 되어준다. 정기적으로 페인트를 칠해준 덕에 정갈해진 아파트의 외관에서는 시민들의 애정과 동료애가 느껴지기도 한다. 도시 전반에 흐르는 세월의 운치를 즐기다 보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지만 가끔은 소란스러운 활기가 그리웠다. 잊고 있었던 도시의 활기를 다시 느끼게 해 준 곳이 지금 살고 있는 동네다.




지금의 동네로 이사 오기 훨씬 전의 일이다. 이제는 한 동네에 살게 됐지만 그때만 해도 이곳은 친구의 동네였고 나는 자취 선배인 친구를 부러워하던 시절이었다. 퇴근 후 친구 직장 근처에서 술 한 잔을 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자신의 동네로 오는 내게 맛있는 곳을 소개해주고 싶었던 친구는 우연히 회식으로 갔다가 발견한 맛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우리가 걷던 거리에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가게가 늘어서 있었지만 목요일 밤에 술을 곁들일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가려면 웨이팅은 필수였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서 모든 것이 준비된 번화가를 채우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기름진 안주에 하이볼과 맥주를 곁들일 수 있는 술집이었다. 마침 우리가 도착했을 때 나가는 손님이 있어서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빠른 비트의 노래와 사람들의 수다가 경쟁하듯 서로를 덮었다. 평소라면 술 한 모금에 그 정도로 들뜨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는 술잔을 부딪히는 순간부터 '좋다'라는 말이 나왔다. 추억 속 어딘가에 묻혀있던 분위기였다. 사회 초년생이거나 어설프게 주름잡는 사람들이 각자의 일과를 끝내고 서툴렀던 하루를 토로하는 시간 속에서 달궈진 생기가 거리에 만연하던 때가 떠올랐다. 지금의 동네로 이사 오기로 한 이유는 교통편과 부동산 시세 때문은 아니었다. 그날 그 술집에서 이미 도시의 생기에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사를 오고 한동안은 도시의 젊은 분위기에 취해있었다. 젊은 입맛을 겨냥한 맛집, 젊은 사람을 상대로 하는 프로모션, 젊은 이웃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의 젊음에서 허점을 찾았다.


평일 출퇴근 시간이면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붐비지만 주말만 되면 거리가 조용하다. 주변 회사만 보고 장사하는 가게들은 주말이면 문을 닫아버린다. 그렇다 보니 주말에 외출을 하고 싶으면 동네를 돌아다니기보다는 지하철을 타고 사시사철 열려 있는 대형 쇼핑몰로 향한다.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 초등학교가 들어서지만 회사가 밀집된 곳에는 오피스텔촌이 형성된다. 즉, 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가정을 이루지 않은 젊은 사람들이 일하면서 살기에는 오피스텔만 한 곳이 없지만 오피스텔에 사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평생 이곳에 살지는 않는다. 오피스텔의 매매가가 전세가와 큰 차이가 없는 이유에서도 알 수 있듯 이곳은 뜨내기들의 동네다. 뜨내기들은 사는 곳에 마음을 온전히 내어주지 않는다. 마음의 한 켠만 내어준 곳이 쓸쓸하게 느껴질 때면 오래됐더라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옛 동네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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