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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Sep 13. 2023

감상에 빠지기에는 너무 힘들었던 자취 첫날

이삿짐을 싸는 데 하루, 다시 이삿짐을 푸는 데 하루

연말이 되면 송년회를 핑계 삼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12월이 금방 지나가곤 한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마무리도 중요하지만 늦더라도 혼자서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 일 년 동안 빼곡하게 쓴 다이어리를 훑어보며 열심히 살았다고 스스로를 기특히 여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제 곧 마무리 지을 일 년과 시작을 앞둔 일 년을 상징하는 두 개의 다이어리를 나란히 둔 채 지난날을 되새기고 앞으로를 계획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매년 치르는 의식이다. 의식이 끝나면 방을 한바탕 뒤집는 대청소를 하면서 안 쓰는 물건을 버리고 가구 배치를 바꿔보기도 한다.

새 집으로의 이사를 앞둔 시점이 마침 연말과 겹치면서 대청소와 짐 싸기를 동시에 할 수 있었다. 이삿짐을 싸기 전 버릴 것은 버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청소가 되어버렸다. 수납공간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을 새 집으로 가져갈 수는 없었다. 짐을 싸기 전, 본가에 두고 갈 것과 새 집으로 가져갈 것을 구분하는 일부터 했다.




이사를 며칠 앞두고 하루를 통으로 짐 싸는 데 할애했다. 체력이 좋을 때 양이 제일 많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옷부터 담기 시작했다. 포장이사라면 규격화된 박스에 담았겠지만 부모님께서 직접 옮겨주시기로 했기 때문에 부피를 덜 차치할 수 있도록 대형 김장 봉투에 담았다. 사계절 옷과 가방, 소품을 다 담고 나니 벌써 반나절이 지나버렸다.

다행히도 옷정리 이후부터는 훨씬 수월했다. 책과 필기구는 조금씩 정리해 뒀기 때문에 그대로 상자에 담으면 됐다. 그릇은 엄마께서 일회용 행주에 하나씩 정성스레 포장해 주셨다. 그럼에도 혹시 상자가 흔들려 깨지기라도 할까 봐 집에 널려 있는 작은 사이즈의 인형들을 그릇 사이사이에 끼워넣으셨다. 폭신폭신한 인형들이 공간에 맞춰 꾸역꾸역 들어가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가져갈 짐들을 모두 방 한 곳에 모아놓고 보니 바깥은 이미 어두웠다. 박스 6개, 대형 장바구니 2개, 캐리어 2개, 대형 김장 봉투 7 봉지. 이렇게 많은 짐들이 어디 다 숨어 있었나 싶으면서도 사람 하나 사는 데 이렇게나 많은 짐이 필요한가 싶어 회의감도 들었다.




이삿날 당일, 주말이지만 출근할 때와 비슷한 시각에 일어났다. 가장 편한 옷을 입고 머리는 커다란 집게 핀으로 말아 올려 고정시킨 채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했다. 차 트렁크와 뒷좌석을 가득 메울 정도로 짐을 싣고 출발하자 묵직함이 느껴졌다. 주말 이른 아침의 도로는 막힘이 없었고 묵직한 차도 힘을 내어 달렸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집 앞까지 카트 없이 맨손으로 짐을 날랐다. 집 앞에서 우리를 반긴 것은 옆집과의 경계선까지 빼곡하게 쌓여 있는 택배 박스였다. 침대가 들어오기 전에 블라인드를 설치하고 옷장을 채워야 했기 때문에 집에 들어서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빠께서 택배 박스 중 블라인드를 찾아 설치하시는 동안 나는 열심히 옷을 꺼내서 옷장 안에 걸었다.

부모님께서 2차로 짐을 가지러 가신 사이 침대 설치 기사가 도착했다. 침대는 블라인드 바로 아래, 옷장 바로 앞에 설치됐다. 새 집에 들어올 가구 중 침대가 가장 크기 때문에 제일 먼저 설치되길 바랐는데 다행히도 아침 일찍 도착했다. 본가에서 2차로 짐을 가져오신 부모님께서는 침대 설치로 인해 입구가 막히자 조금이라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신발장에 신발을 넣기 시작하셨다.


점심을 먹고 오자마자 매트리스 설치 기사가 맞물려 도착하더니 배송이 늦을 거라던 소파를 포함해서 모든 가구가 도착했다. 부모님께서 가신 후에는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짐을 정리했다. 오후 2시쯤 소파 조립을 끝내고 시범 삼아 앉아봤다. 생각만큼 푹신하지는 않았지만 그날 처음으로 앉아보는 쿠션 있는 의자였다.




큰 소리가 날 만한 일은 해 지기 전에 모두 끝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자잘한 물건을 정리했다. 가장 중요한 인터넷 공유기 설치를 시작으로 책상 위를 정리하고 서랍을 채우고 화장품을 진열했다. 예전 같았으면 책장에 책을 꽂으며 세월아 네월아 한 권씩 펼쳐봤겠지만 그날만큼은 기계적으로 척척 꽂아 넣었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기존의 식기 건조대를 치우고 설치한 새 식기 건조대에 깨끗이 씻은 그릇을 올려놓는 것으로 모든 정리가 끝났다. 환기를 위해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듯 들어왔지만 춥다고 느끼기는커녕 땀을 식혀줘서 고마웠다.

가족부터 친구까지 모두가 도와준 덕분에 이사를 잘 끝낼 수 있었다. 이사는 끝났지만 집이라는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가구든 생활용품이든 살 건 웬만큼 샀다고 생각했는데 정리하다 보니 필요한 것이 보였다. 내일 당장 사러 가기 위해 메모를 하는 와중에도 집을 둘러보며 정리할 곳이 더 있나 살펴봤다. 따듯한 물에 샤워를 하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눕히자 온몸이 뻐근해지며 일찍부터 휴식이 필요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집에 필요한 것만 생각하느라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제야 챙겼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새 집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밤이라는 감상을 즐길 새도 없이 잠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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