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실 Sep 07. 2023

서울 태생의 경기도민, 다시 서울에 입성하다

나도 이제 서울 사람이다

예전 직장 동료 중 유독 나를 '지방 사람'이라 놀리던 사람이 있었다. 모순적인 것은 그 동료야말로 지방에서 상경했다는 것이다. 서울 출신이 아니지만 현재 서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경기도민인 나의 긴 통근 시간을 놀리며 나를 '지방 사람'이라 불렀다. 직장동료로서는 꽤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장난인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나야말로 가족관계증명서에 서울 한복판 주소가 떡하니 적혀 있는, 서울 태생의 '서울 사람'인데.




나는 당시 산부인과로 유명했던 논현동의 대학병원에서 태어났다. 그 일대 땅값이 비싼 줄도 몰랐던 아기는 유치원에 들어갈 때쯤 강남 생활을 접고 한강을 건너가 살게 됐다. 그래도 여전히 한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울이었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 신도시 개발이 한창이던 경기도로 이사를 갔다. 부동산 시장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강남에서 태어나 경기도로 오는 일이 경기도에서 태어나 강남으로 가는 일보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를 깨우쳤다. 하지만 경기도에 사는 것에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태어난 동네보다 초중고를 모두 졸업한 동네에 고향의 정을 느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생활반경이 넓어졌다. 학창 시절, 문에서 문까지 최대 30분을 넘지 않는 통학 거리를 다녔던 탓에 한 시간 반으로 훌쩍 늘어난 통학 시간은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수업 시간을 나름 자유롭게 계획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학을 다닐 때는 경기도민이라는 것이 '조금 불편한' 정도였다. 하지만 졸업 후 취업 준비를 하며 통근 거리의 현실성을 고려해 서울의 절반을 날려 버릴 수밖에 없게 되자 경기도민으로서의 불편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랬던 내가 무조건적인 이직을 위해 지역불문하고 원서를 쓰다 보니 예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지역에 직장을 얻은 것이다. 새로운 직장에 합격하자마자 자취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니다가 너무 힘들면 그때 가서 자취를 생각해 보자'라던 말속에 진심은 그다지 담겨 있지 않았다.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플랜 B를 손에 쥐어주며 나를 달래려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첫 출근을 앞두고 밤새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휴대전화 알람을 확인하며 행여 지각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모습은 앞으로의 출근길이 걱정과 피곤함으로 이루어질 거라는 예고였다.




예고는 적중했고 나를 달래려던 말은 예언이 되었다. 서울에서 자취를 하겠다고 선언한 뒤 계약까지 마쳤을 때 엄마께서는 '서울로 돌아가는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결혼 전까지 서울에서만 사셨던 엄마께 서울은 고향이다. 엄마는 각박한 서울살이 속 고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는 작품을 읽을 때면 서울 사람에게도 서울에 대한 향수가 있음을 강조하는 진정한 서울 사람이다. 나도 엄마처럼 태어난 곳이 서울이지만 우리 두 사람이 서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엄연히 다르다.


서류상으로는 '서울로의 복귀'지만 정서적으로는 '복귀'라는 단어가 와닿지 않았다. 이미 나는 종점에서 지하철을 타면 아무리 먼 거리도 앉아 갈 수 있어 좋다고 말하는, 뼛속까지 경기도민이기 때문이다. 사실 직장이 서울에 있는 게 아니라면 굳이 서울에 사는 것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아니, 서울 어디인지에 따라 경기도가 더 나을 수도 있다. 서울로의 접근성이 좋다는 것이 경기도의 장점이지 않은가. 그 덕분에 서울에 대한, 서울살이에 대한 로망도 없었다. 내게 서울은 그저 직장을 위해 선택한 도시, 딱 거기까지였다.




전셋값의 잔금을 치르던 날 아침, 걱정하던 대출이 승인된 덕분에 무사히 잔금을 치를 수 있었다. 이제 와서야 생각해 보니 마음 졸일 필요도 없었다. 부동산 중개인에게 복비까지 입금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났다. 나는 바로 동사무소로 가서 전입신고를 완료했다. 동사무소 직원은 운전면허증에 새 주소가 적힌 투명 스티커를 붙여줬다. 직원이 건넨 주민등록등본에는 나 혼자만이 올라와 있었고 서울시로 시작하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등본을 보고 있으니 나를 '지방 사람'이라고 놀렸던 전 직장 동료가 떠올랐다. 직장을 옮기면서 자연스레 연락도 뜸해진 사이인데 어째서 떠오른 걸까? 내 손에 쥐어진 등본이 동료의 장난에 대한 통쾌한 복수라도 되는 줄 알았던 걸까? 그제야 깨달았다, '서울에 산다'는 의미는 엄마가 느끼는 고향에 대한 향수도 아니요, 직장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도 아니라는 것을. 나의 서울 살이에는 나도 몰랐던 경기도민으로서의 콤플렉스를 떨쳐냈다는 후련함과 서울이라는 지역에 대한 허영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서울에 집을 얻었다는 사실에 무심한 척 굴던 가면을 벗어 버리고 마음속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나도 서울에 사는구나.'

이전 04화 돈이 없어도 집을 구할 수 있는 마법을 부리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