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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Sep 11. 2023

냄새 말고 돈 먹는 하마를 들이다

그럼에도 나만의 보금자리는 뿌듯하다

입주청소가 완료된 다음 날, 퇴근 후 새 집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집 비밀번호부터 바꾸고 깨끗해진 집으로 들어섰다. 입주청소는 처음이라서 어느 정도까지 청소를 해주는지 감이 없었는데 화장실 구석진 곳까지 깨끗해진 것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찌든 냄새까지 빠지지는 않았다. 창문을 활짝 열어 차갑고 매서운 겨울바람으로 냄새를 빼보려 했으나 그때뿐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냄새가 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코를 킁킁거리면서 벽지부터 서랍장, 하수구까지 맡아본 끝에 냄새의 원인을 찾았다. 원인은 신발장이었다. 이사 오자마자 냄새 먹는 하마부터 한 마리 들여놔야겠다고 다짐했다.


새 집을 방문한 목적은 사실 따로 있었다. 가구를 주문하기 위해서 공간의 정확한 수치를 잴 필요가 있었다. 집에서 들고 온 5m짜리 줄자로 이곳저곳의 길이를 재보며 머릿속으로 가구를 배치했다. 소파를 들여놓을 공간이 있을지, 책상 의자를 끝까지 빼고 앉으려면 몇 센티 넓이의 의자를 사야 할지까지 세세하게 고민했다. 심지어 프라이팬 거치대를 놓기 위해 싱크대 하부장 구조까지 완벽하게 파악했다. 치수를 다 재고 집을 둘러보니 텅 비어있는데도 좁아 보였다.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2인용 소파는 새 집에 너무 컸고 집에서 쓰고 있는 책상 의자를 가져왔다가는 책상에 배를 바짝 붙여 앉아야 할 판이었다. 이제부터는 가구 구입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나의 오랜 로망이었던 소파는 구입할 가구 목록에서 제일 위에 있었다. 부모님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2인용으로 찾아봤지만 집에 맞는 사이즈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노력 앞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기가 막히게 사이즈가 딱 맞는 소파를 찾아냈다. 혼자서는 넉넉하게 쓸 수 있고 둘이서도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소파를 찾은 것이다. 다음으로 고를 가구는 식탁이었다. 식탁 역시 부모님의 현실적인 조언을 받아들여 원형 식탁을 과감히 포기하고 일반적인 사각형의 식탁으로 골랐다. 식탁의 뒤를 이어 사야 할 가구 목록이 줄줄이 이어졌다. 침대, 협탁, 책상 의자 등 사야 할 게 많다는 사실은 막연하게 생각하면 즐겁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트레스받기 쉬운 일이었다.


평수가 넓은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구를 고를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요소는 크기였다.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인지를 가장 먼저 확인해야 했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는 수납공간이었다. 집이 좁을수록 수납공간은 많아야 하기 때문에 수납공간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가구들로 골랐다. 침대는 매트리스 밑에 수납공간이 있는 것으로 골랐고 침대 협탁도 서랍이 많은 것으로 선택했다. 디자인과 색상을 고르는 여유는 가장 마지막 단계로 밀려났다.


가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만 살펴보기도 버거운데 그 외에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더 있다. 바로 배송과 설치 과정이다. 먼저 배송부터 살펴보자면, 배송 기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배송 날짜를 지정할 수 있는지, 평일에는 직장에 있다면 주말 배송이 가능한지도 확인해야 한다. 다음으로 설치와 관련해서는 완성된 제품인지 아니면 조립이 필요한 제품인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완제품이라면 집 현관을 통과할 수 있는 크기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만약 조립이 필요하다면 구매자가 직접 조립해야 하는지 아니면 설치기사가 방문해서 조립해 주는지도 알아봐야 한다. 설치기사가 온다면 설치비가 따로 드는지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따져봐야 할 게 이렇게나 많다 보니 이사를 앞두고는 사무실에 있다가도 툭하면 전화를 받으러 달려 나갔다.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가도 '패브릭 소파면 금방 더러워지겠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 정도로 새 집을 꾸미는 것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큰 가구만 고르는데도 머리가 아픈데 이제부터가 진짜다. 아직 자잘한 것들은 거들떠보지도 못했는데 오히려 이사 후에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던 자잘한 물건들이다. 생각해 보면 식탁이 없어도 바닥에서 밥을 먹으면 되지만 샴푸가 없으면 이사 첫날부터 개운하게 씻을 수조차 없다. 비누나 휴지처럼 무심코 사용하던 생활용품까지 구입 목록에 추가하니 이거 완전 돈 먹는 하마가 따로 없었다. 내가 들이려던 하마는 냄새를 먹어야 하는데 돈을 먹고 있다니. 꿈같은 자취를 꿈꾸며 새 제품을 살 생각에 부풀었던 나는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고자 집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웬만하면 가져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자취가 돈 먹는 하마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지출 계획을 빠듯하게 수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만의 첫 보금자리를 생존을 위한 가구와 물건들로만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꿈으로 그려왔던 이상적인 집의 모습은 의외로 침구를 통해 발현됐다. 부모님 댁에서 살 때는 직접 침구를 고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께서 사주시는 이불에 불만이 없었기에 추울 때는 극세사를, 더울 때는 삼베를 덮고 잤다. 그러나 내가 직접 고르게 되자 바스락 소리가 나는 호텔 이불이 눈에 들어왔고 예전에는 관심도 없던 베개 커버에 예상치 못한 거금을 썼다. 하지만 우연히 방문한 자라홈에서 발견한 올리브색 무늬의 베개 커버가 집에 돌아가서도 눈에 밟히는 걸 어떡하겠는가.




새 집을 꾸밀 생각으로 가구를 사고 각종 물품을 구경하고 있으니 어렸을 때 했던 심즈 게임이 떠올랐다. 정성스레 집을 짓고 정원을 꾸미고 인테리어부터 가구 배치까지 내 손으로 직접 한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 하지만 집을 다 완성하고 나면 허무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서 만든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게임 속에만 존재할 뿐이니까. 그랬던 내게 나만의 집이 생긴 것이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허무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기대되는 나의 보금자리.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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