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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Aug 31. 2023

자취 라이프의 오랜 로망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다

자취생에게 소파는 사치스러운 로망일까

부동산에 계약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고 가계약금 100만 원을 보내려고 하는데 팀장님이 나를 부르더니 함께 점심식사를 하자고 했다. 팀장님이 사원급과 단둘이서 식사하는 모습을 입사 3개월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지만 속뜻을 고민하기에는 부동산 계약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나가자고 했을 때도 나는 개인적으로 처리할 일이 있으니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할 정도였다. 팀장님은 쿨하게 먼저 나가 있겠다고 하며 사무실을 나갔고 나는 바로 가계약금 이체에 집중했다.

서둘러 사무실을 나와 팀장님과 함께 가게로 걸어가는 동안 아까 얘기한 '개인적으로 처리할 일'이 무엇인지 팀장님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꼈다. 먼저 손을 내밀어 같이 밥을 먹자고 한 사람에게 '개인적'을 들먹이며 늦게 나온 것이 마치 선을 그은 것처럼 매정해 보이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자취를 하려고 집을 알아봤다는 말로 슬며시 운을 뗐다. 팀장님은 의외의 주제라는 듯 놀라며 관심을 보였다. 팀장님은 작고 연륜 있어 보이는 돈가스 가게로 나를 데려갔고 돈가스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자취 스토리를 들려줬다.




알고 보니 팀장님은 결혼 전 10년 넘게 자취를 했는데 셰어하우스, 원룸, 고시원 등  다양한 주거 형태에서 살아봤다고 했다. 딱 하나, 오피스텔에서만 살아본 적이 없는데 오피스텔은 시설도 좋고 편할 거라며 나의 자취를 응원해 줬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집 안을 어떻게 채울지로 이어졌다. 나는 멋쩍은 웃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호한 말투로 소파는 무조건 둘 거라고 말했다. 자취방에 소파가 웬 말이냐 싶을 수도 있지만 소파는 오랫동안 나의 로망이었다. 엉덩이를 푹신하게 받아주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풋스툴에 다리를 올려놓은 채 쿠션 위에 책을 두고 독서를 즐기는 모습은 꿈에 그리던 자취생활의 한 컷이다.

팀장님은 첫 자취인만큼 사고 싶은 것은 다 사보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보라며 '일단은 사고 아니다 싶으면 나중에 당근에라도 팔면 되죠'라는 다소 사치스럽지만 위로가 되는 격려를 건넸다. 가구를 살 생각만 했지 중고 마켓에 팔 생각은 하지 못했기에 격려는 깨달음이 되어 로망을 실현하고 싶은 마음을 부채질했다. 그래, 수년 간 꿈꿔온 것이 아까워서라도 시도는 해보자.




나의 자취 로망은 TV 예능 '나 혼자 산다'와 함께 성장했다. 자취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지 않았던 20대 초반에는 자취를 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궁금해서 프로그램을 봤다. 당시 출연진들의 자취 라이프는 서민에 가까웠기 때문에 과 선배의 자취방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출연진이 바뀌면서 자취 라이프의 풍조에도 변화가 생겼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생활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로망이 될 수 있는 자취 라이프가 펼쳐졌다. 그 시기가 마침 직장을 다닐 때와 맞물려서 '나도 언젠가 자취를 한다면'이라고 상상하며 로망을 쌓아나갔다. 프로그램 속 출연진들의 삶이 점점 럭셔리해지면서 소득 수준의 차이를 실감하게 되자 더 이상 프로그램이 즐겁지 않았다. 프로그램 시청을 중단하니 내게 자취 욕구를 일으키는 자극제가 사라졌고 자취에 대한 생각도 함께 사라졌다.

TV 속 자취 라이프가 부러워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자취를 다짐한 것은 맞지만 집까지 필요 물품으로만 채우란 법은 없지 않은가. 자취 물품 목록 제일 위에 소파부터 적고 나서 다른 가구들을 생각해 봤다. 책상에서 밥을 먹기보다는 식탁이 있어야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있을 테니 식탁을 하나 사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아, 원형 식탁을 두고 가운데 화병이나 조명을 두면 정말 예쁠 거야. 이것도 내가 예전부터 꿈꿔왔던 장면 중 하나가 아닌가.




로망으로 가득 찬 목록을 들고 부모님께 조언을 구했다. 부모님은 내 로망을 존중해 주셨지만 날카롭고 현실적인 충고도 빼놓지 않으셨다. 소파를 두고 싶으면 둬라. 하지만 일인용은 너무 비실용적이다. 게다가 침대보다 비싼 소파라니, 정말로 이 정도 가치가 있는지 생각해 봐라. 책상에서 밥을 먹는 것은 반대다. 식탁이 있어야 하지만 원형 테이블은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한다. 집의 크기를 생각하고 가구를 다시 생각해 봐라.

부모님의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을 듣고 포기할 건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더 넓은 집으로 옮기면 다시 끄집어내기로 하고 푹신한 일인용 소파와 도란도란한 원형 테이블을 원래 있던 로망의 자리로 돌려놨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소파와 식탁이라는 큼직한 로망이 남아있었다. 남은 로망을 현실과 잘 버무려서 실현시키는 것이 앞으로 내가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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