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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Aug 23. 2023

드디어 자취를 시작하다

한 번 더 찾아온 20대의 마지막 겨울을 맞이하며

새로운 직장으로 옮긴 후 한동안 하지 않았던 야근을 했다. 일 년에 야근이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던 회사에서 옮겨온 거라 야근이 더욱 야박하게 느껴졌다. 신규가 아닌 충원으로 들어가 전임자의 업무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던 탓에 직함은 아직 수습사원이었지만 업무만큼은 이미 정규 발령을 받은듯했다. 예전부터 오고 싶었던 회사로의 이직과 인생에서의 첫 정규직이라는 타이틀은 내게 꿈에 그리던 상황임을 상기시키며 버티라고 주문을 걸었다.


사실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낯선 업무도 아니요, 야근도 아니었다. 바로 왕복 4시간의 출퇴근길이었다. 경기도 북쪽에 자리한 신도시에서 출발해 서울 한복판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통근길은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다. 걷는 시간 50분을 제외하면 3시간 10분을 전부 지하철로 이동한다. 자리에 앉아서 가는 날보다 서서 가는 날이 많다 보니 허리는 아프고 피로는 쌓였다. 4시간의 출퇴근으로 자취하면 나갈 돈을 아낄 수 있다는 긍정회로도, 무의미한 출퇴근 길을 독서와 영화 감상으로 채워보겠다는 다짐도 서서히 무너져갔다.




자취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직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전세자금대출을 알아보러 은행을 찾았지만 재직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설령 대출 자격이 됐다고 해도 최대 1억이라는 대출 한도 충족시키면서 수십 년간의 아파트 생활로 높아진 안락한 기준에 맞는 집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중에 있는 돈으로 월세를 구하자니 그건 또 돈이 너무 아까웠다. 결국 현실적인, 다르게 말하면 금전적인 문제에 부딪혀 자취를 단념해야 했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씻고 나면 내게 허락된 순수한 자유시간은 기껏해야 1~2시간이었다. 어디로 이직을 하던 워라밸이 최우선 순위던 나였는데. 입사 첫날, 회사 대표는 내 이력서에 적힌 주소를 보고는 "집이 너무 멀어서 중간에 관두는 거 아니죠?"라고 물었다. 나는 '그 정도 각오도 안 하고 처음부터 지원했겠어요?'라는 마음을 담아서 가볍게 웃으며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대답이 너무 호기로웠던 걸까? 이직보다는 이사부터 고려해 보기로 결심하고 한동안 접어두었던 자취의 꿈을 끄집어냈다.


현재 시세와 내가 모아둔 돈, 그리고 전세자금대출로 받을 수 있는 돈을 저울질했다. 그러자 분명 두 달 전만 해도 불가능했던 전세 구하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갑자기 전셋값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두 달 만에 내가 부자가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답은 대출 한도의 상향이었다. 1억까지 대출이 가능하던 정책이 한 달 전 2억으로 바뀐 것이다. 나는 두근 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한번 전세자금대출 안내문을 꼼꼼하게 읽어본 다음 결심했다, 드디어 자취하기로.




대출 한도의 상향은 내게 기적 같은 일이었다. 입사 첫 달, 은행에서 들었던 한 달만 참고 다녀보라는 직원의 말이 예언처럼 번쩍였다. 물론 그 직원이 한도 상향을 예측하고 건넨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상황이 이렇게 되니 마치 우주의 기운이 내게 몰리는 것만 같았다.


낙엽은 다 떨어지고 겨울 초입에 다다른 11월이었다. 원래 나이로라면 이미 서른이 넘었지만 갑작스러운 만 나이법 덕분에 앞자리가 내려가 다시 이십대로 돌아왔다. 서른이 되기 전에 제대로 어른이 되어보려는 것처럼 또 한 번 찾아온 20대 마지막의 겨울은 독립에 대한 꿈으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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