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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Oct 10. 2023

생애 최초로 한강 이남에 살다

서울 어디든 한 시간 안에 갈 수 있다면

엄밀히 따지면 생애 최초는 아니다. 기억에도 없는 어린 시절, 이제 막 걷기 시작할 때쯤까지는 방배동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음마를 떼기가 무섭게 한강을 건너왔고 그 이후부터는 한강 이북을 떠난 적이 없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도시에서 다녔으며 성적에 맞춰간다는 대학교조차도 운 좋게 감당할 만한 통학 거리에 있는 곳에 합격했다. 취업만 돼도 감지덕지였던 취준생 시절에도 과감하게 한강의 남쪽은 제외할 정도로 지고지순하게 한강 이북만을 고집했다.


장롱면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뚜벅이 생활을 유지하는 내게 지하철과 버스는 주요 교통수단이다. 바깥 풍경을 보며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버스를 선호하지만 낭만보다는 시간 엄수가 중요해지는 시기가 오자 버스보다 지하철을 선택하는 일이 많아졌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넌다는 것은 어둡고 덜컹거리는 일상에 빛이 찾아오는 것과 같다. 날씨 좋은 날의 한낮이면 강물과 햇살이 만들어낸 별빛이 반짝이고 어두운 밤이면 도시의 불빛이 멀리서 반짝인다. 지하철로 한강을 건널 때만큼은 잠시 고개를 들어 바깥을 내다보며 일상에서 벗어나본다.




한강을 건너는 일이 이벤트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그만큼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의 직장을 다니기 전까지 나의 소속은 늘 한강 이북이었다. 매일 같이 오고 가며 익숙해졌고 자연스레 한강 이북에 매력을 느꼈다. 지금의 수도 서울은 정가운데 한강을 품은 모양이지만 조선 시대 때 이르던 수도 한양은 도성이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 전부였다.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나라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도시 위로 역사가 쌓였고 지금은 그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되었다. 나는 시간이 남을 때든 일부러 시간을 내서든 역사가 쌓인 도시를 거니는 것이 즐거웠다.


한강 이북 지역의 가장 큰 장점은 돈 한 푼 없이도 갈 수 있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가로수가 드리워진 길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좋은 명당에 위치한 역사적인 장소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만 24세를 넘기지 않았다면 고궁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으니 평일 대낮에 한가한 고궁에 앉아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그래봤자 볼거리가 고궁과 박물관 밖에 없지 않냐며 단조롭고 뻔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20대 초반에는 도시를 덮은 것이 고층 건물이 아니라 역사라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꼈다.




종로 일대를 쏘다니기 바빴던 시절에도 한강을 건너야만 했던 때가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가입했던 동아리에서 다 같이 여의도 벚꽃 축제를 가게 된 것이다. 집에서 여의도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여의도로 향했다. 벚꽃이 만발한 여의도에는 벚꽃 잎 수만큼 사람이 많았고 내 발로 걷는다기보다는 인파에 몸을 실어 이동해야 했다. 여차저차 벚꽃 구경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눈은 무겁고 발은 아팠다. 하지만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사람 마음이 다 똑같았는지 집까지 한 번에 가는 경기권 직행버스를 기다리는 줄은 도로를 다 메울 정도로 길었다. 겨우 버스에 타서 앉지도 못한 채 집으로 향하는 길에 생각했다, 다음부터 벚꽃 구경은 무조건 가까운 곳으로 가야겠다고.

여의도 벚꽃 축제를 다시 찾은 것은 자취를 시작한 이후인 올봄이었다. 여의나루역에서 나와 커피 한 잔을 들고 끝이 보이지 않는 여의도 벚꽃길을 걸었다. 여전히 사람은 많았지만 벚꽃나무길을 왕복으로 오갔음에도 체력이 남아서 더 둘러보고 싶은 아쉬움을 느꼈다. 지하철로 여의도까지 20분도 걸리지 않다 보니 조금 무리하는 날은 여의도 한강 공원까지 걸어서 간다. 특별히 갈 데가 없는 날이면 여의도에 있는 대형 쇼핑몰에 가서 영화를 보든 밥을 먹든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그렇다 보니 돈을 써야 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럴 때면 교통카드만 들고 도시를 쏘다녔던 10년 전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지금도 여의도로 놀러 갈 때면 '내가 여의도를 이렇게 자주 오게 될 줄이야'라며 감탄한다. 올 가을에 단풍을 구경하러 석촌 호수로 갈 생각을 하고, 크리스마스에는 광화문과 잠실을 오가며 대형 트리를 구경할 생각에 벌써 신이 난다. 이제 서울 어디로 가든 한 시간을 넘기지 않는다는 기적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아직까지도 문득문득 놀랍다. '굳이 한강을 건너서 까지'라고 생각하던 내가 여의도는 잠실이든 한강의 이남 지역으로 가는 것이 두렵지 않아 졌다.

그렇다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나를 반겨준 한강의 북쪽을 잊은 것은 아니다. 날씨가 좋을 때면 실내로 들어갈 일이 많은 강남보다는 강북을 선호한다. 똑같이 북적여도 건물 숲보다는 진짜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가고 싶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나무가 뻗어 있는 곳, 낮은 건물과 한글 간판이 어우러진 곳, 돈 한 푼 없이 걷기만 해도 즐거운 곳, 계단에 앉아 버스킹 하는 음악가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곳. 그래서 나는 봄과 가을이 찾아오면 다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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